한국일보

하루 일을 끝내고

2025-10-27 (월) 12:00:00 조형숙 시인·수필가 미주문협 총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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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은 천천히 창 턱으로 기울어그림자를 벽에 눕힌다. 나는 오늘 하루의 시간을 되짚는다. 친구와 나눈 따뜻한 밥 한끼와 한 줌의 말이 서로의 마음에 온기를 주었다. “별일 없지?” “잘 지내지?” 짧은 인사 속에는 많은 하루가 들어있다. 누군가와 식사를 하고, 진심어린 대화를 나눈 하루는 의미 있는 삶의 한 조각이 된다. 우리는 커피가 식는 것도 잊은 채 서로의 하루를 조금씩 옮겨 담았다. 창 밖 어둠이 내려 앉을 때 남은 건 밥보다 말이었다. 노을 빛도 그치고 말도 그친 시간에 다시 조용히 나에게로 돌아온다.

하루의 남은 시간을 영화’ Maid’로 채운다. 작가 지망생인 알렉스는 남편의 학대를 피해 ‘학대 받는 여자들의 합숙소’를 전전한다. 누구도 지원해 주지 않는 현실 속에서 청소일을 시작한다. 알렉스는 정부복지 시스템, 법정, 일터의 차별, 현실의 장벽들과 끊임없이 싸우며 어린 딸과 자신을 위한 삶을 찾는다. 그 와중에도 짬짬이 일상을 기록한다. 시애틀 북쪽 한적한 시골마을의 빈곤과 결핍, 사회적 단절을 떠나 매일 아침 페리를 타고 본토로 간다. 그 곳은 좋은 집이 많고 청소 서비스 수요가 높다. 페리 이동은 단순한 출퇴근이 아니다. 더 나은 삶을 향한 통로이며 자립을 위한 인내의 여정이다.

어느 날 주인이 집을 비웠다. 센스 있는 알렉스는 집안을 완벽하게 청소한 뒤 조심스레 집주인의 삶을 흉내 낸다. 그 장면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선다. 상상은 내일을 견디게 하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자존감이다. 신발을 벗고 마루를 느껴본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본다. 바다가 보이는 탁 트인 거실, 햇살 좋은 창가에서 책을 읽는다. 옷방의 예쁜 드레스를 걸치고, 붉은 립스틱,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우아하게 걸어 본다. “내가 이 집 주인이면 얼마나 좋을까?” “내 아이가 안정된 삶을 살 수 있겠지” 보편적 감정을 자극하며 깊은 공감을 불러온다. 정갈한 정원에서 와인 잔을 들고 춤을 추며 야외 수영장의 여유도 만끽한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거울 앞에 선 그녀는 잠시 부잣집 여주인이 되어 가진 자의 삶을 체험한다. 존재 자체로도 아름다운 순간, 남의 삶을 닦는 일을 하는 여자인 것을 자각하고 조용히 웃으며 옷을 벗는다.


결핍을 경험한 사람들이 상상하는 가진 자의 세계는 질투나 동경일 수 있으나 삶의 피곤함과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잠시 나를 떠나 그 경계선을 넘어 여유를 맛보는 상상은 삶을 견디게 하는 작은 숨구멍이다. 알렉스의 상상은 궁핍함속에서도 꿈을 놓지 않았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일어나 역경을 헤쳐 나가며 자신과 아이를 위해 건강한 선택을 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입학허가서를 받아 학교로 향하는 그녀의 환한 얼굴이었다. 고단한 하루하루의 기록이 결국 새로운 삶의 초석이 되었다. 성공을 위한 작은 걸음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바닥에 잔광도 스러지고 시계 초침만이 하루의 무게를 털어 낸다. 창 밖 나무 그림자 사이로 나의 숨결도 살며시 섞인다. 그녀의 용기와 상상이 내 안에도 작은 불씨로 남았다. 어쩌면 나도 상상을 품고 하루를 견디는 사람일지 모른다. 이제 오늘을 정리하고 고요한 안도감으로 하루의 끝을 놓아주며 내일의 문을 살짝 연다.

<조형숙 시인·수필가 미주문협 총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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