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운수 좋은 날

2026-02-16 (월) 12:00:00 조옥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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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웨이가 막힌다.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할까 초조해진다. 중요한 모임이라 시간을 넉넉히 두고 출발했는데 이런 날일수록 예기치 못한 이변이 생긴다. GPS는 전방에 충돌사고가 있다고 전한다. 카풀을 포함하여 다섯 차선이 모두 막혔으니 어느 차선에서 사고가 났는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로컬 길로 빠질까 하여 차선을 바꾸려고 앞뒤를 살피는데 슬며시 한 장면이 끼어든다.

오래전, 자식들이 모여서 낄낄거리더니 핸드폰을 내 얼굴 가까이 내밀었다. ‘머피의 법칙’을 코믹하게 풀어낸 유튜브 영상이었다. 출근길의 남자가 막힌 차선을 피해 옆 차선으로 옮기자, 막혔던 그 차선은 풀리고 새로 옮긴 차선이 다시 막힌다. 그는 그렇게 차선을 오가며 성질을 내고, 나는 그런 그를 보면서 재미있어 웃었다.

‘머피의 법칙’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고 자꾸 꼬이는 상황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미국공군 대위 에드워드 머피(Edward Murphy) 로부터 시작되었다. 급할 때일수록 신호등은 빨간색이 되고, 기다리던 전화는 샤워할 때나 운전할때 걸려 오고, 상점의 계산대에 줄을 섰는데 하필이면 영수증 프린트 종이가 내 차례에서 떨어지고, 비 소식이 없다고 해 우산을 챙기지 않았더니 소낙비가 내리고 등, 바쁜 세상에 사소한 일마저 본인 의지대로 돌아가지 않고 지체되니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이런 상황에 부닥치면 당사자에게는 재수 없는 날인데 왜 제삼자는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질까.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차가 정체된 김에 한 번 생각해 봐야겠다.


인간의 마음 밭이 황폐해서일까. 아니면 운 없는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는 안도감인가. 혹은 누구나 당할 수 있다는 동질감에서일까?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등,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경우를 대입해 봐도, 머피의 법칙은 내 뜻대로만 세상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것 같다. 말없이 반복되는 일상사를 통해, 스스로 느끼고 돌아보며 인격의 꽃을 피우라는 우주의 섭리가 아닐까 싶다. 드디어 사고 현장이 눈에 들어온다. 14피트 트럭이 옆으로 길게 누워 있다. 심각한 부상자가 생겼을 듯하다. 순간, 내가 지체한 삼십여 분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사라진다.

정신이 올바른 사람은 남의 치명적인 불운을 보며 웃지 못한다. 해프닝 같은 가벼운 엇갈림은 대부분 유머로 넘길 수 있지만, 지독한 머피의 법칙도 있어서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본 친구가 있다. 치킨집을 개업하면 곧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돼지고기 삼겹살집을 개업하면 돼지열병이 퍼지고, 정말로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친구 부부는 항상 감사를 입에 달고 살았다.

자연은 우리에게 늘 신호를 보낸다. 비가 오려면 바람은 스산해지고, 까마귀 울음은 거칠어지며 곤충들도 부산하게 움직인다. 내 어린시절의 어른들은 기상대의 예보가 없어도 공기의 흐름과 냄새에 따라 비 올 것을 대비하고 단속했다. 현명한 사람은 넘어졌다 일어설 때 돌멩이 하나라도 주워 들고 일어난다고 한다. 내 친구도 넘어졌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빈손으로 일어서지 않았기에 머피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리라. 나도 오늘, 정체된 길에서 돌멩이 하나를 주워 든다. 운수 좋은 날이다.

<조옥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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