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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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뀌어서 늙는 건 아니다

2022-12-27 (화) 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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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렉 같은 영화에나 나오는 우주여행이 현실화됐다. 이미 갑부 15명이 올해 우주정거장에 다녀왔다. 지난 8월 발사된 한국의 달 탐사선 ‘다누리’도 열흘 전 달 궤도 1차 진입시도에 성공했다. 달나라 여행이 머지않은 마당에 우주선보다 더 빠른 타임머신도 나올 법하다.

130년 전 H.G. 웰스가 쓴 동명소설 속의 ‘타임머신’은 우주가 아닌 지구의 먼 미래나 과거 속으로 찾아가는 시간여행 기계다. 타임머신 소설의 주인공은 서기 802701년의 세계에 도착해 인류의 먼 후손으로 보이는 선과 악의 두 종족과 조우한다. 그는 타임머신을 훔쳐간 지하의 악인 종족과 고군분투 싸운 끝에 간신히 타임머신을 되찾아 3,000만년 정도 더 미래 세계로 날아간다. 그곳엔 생명체가 전혀 없고 태양만 이글거린다. 그는 현세로 돌아온 후 아무도 자신의 여행담을 믿어주지 않자 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떠난다.

타임머신이 아닌 비행기를 타고 LA에서 서울에만 가도 하루 빠른 미래를 경험한다. 반대로 서울에서 LA에 온 사람은 거의 두 배로 길어진 하루를 보낸다. 그중 일부는 과거 시간이다. 그뿐 아니라 대다수 미국인들은 봄철에 한 시간 미래로 갔다가 늦가을에 한 시간 과거로 회귀한다. 하지만 이런 걸 시간여행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날짜 변경선에 따른 시차제와 일광절약시간(서머타임)의 장난일 뿐이다,


실제로 ‘미래로의 회귀(Back to the future)’라는 공상과학 코미디영화가 있었다. 한 10대 청년이 엉겁결에 타임머신 자동차를 타고 자신이 태어나기 30년 전으로 돌아가 겪는 갈팡질팡 모험담이다. 그는 장차 자신의 부모가 될 자기 또래의 얼간이 남학생과 그가 짝사랑하는 여학생을 우여곡절 끝에 맺어주고는 연료가 떨어진 타임머신 자동차를 번갯불로 충전시킨 후 미래인 현세(1980년대)로 회귀한다.

하지만 그보다 일찍 나온 또 다른 공상액션 영화 ‘수퍼맨(Superman)’에선 세월이 거꾸로 간다. 악당들이 발사한 미사일로 ‘빅원’이 촉발되고 갈라진 땅에 자동차가 함몰돼 수퍼맨이 흠모하는 여기자가 숨진다. 수퍼맨(위장취업 기자)은 광속보다 빠르게 지구둘레를 시간의 반대방향으로 계속 날아가 지진발생 이전 시점에 도달한다. 여기자가 무사해진 건 물론 미사일과 지진의 모든 피해가 없었던 일이 된다.

시간을 되돌리지 않고 붙들어 맨 얘기가 성경에 나온다. 가나안땅 정복에 나선 여호수아가 적군을 진멸할 충분한 시간을 갖도록 여호와가 해와 달을 멈춰 세웠다. 어빙 워싱턴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립 반 윙클은 산에서 요정들이 주는 요상한 술을 마시고 곯아떨어졌는데 깨어보니20년이 흘렀다. 하지만 그 20년은 붙들어 맨 게 아니었다. 수염이 백발이 돼있었다. 죽은 듯이 잠만 자도 늙는다는 얘기다.

늙고 싶지 않은 건 동서고금 모든 사람의 소망이지만 헛일이다. 양귀비도, 리즈 테일러도 늙었다. 고려말 학자 우 탁은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 듯 불고 간데없다, 작은 듯 빌어다가 머리 위에 불리고자, 귀밑의 해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노라”라고 소망했고 “한 손에 막대 들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라고 한탄했다.

인생 100세 시대를 맞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유행어가 됐다. 실제로 많은 노인들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정정하다. 지난주 한국에서 거창하게 송년모임을 가진 고교 동창생들이 동영상을 보내왔다. 80대초 노인네들이 모두 피둥피둥하다. 대머리가 많아져서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어렵지만 화색은 모두 좋았다. 올 한해를 무탈하게 보낸 친구들은(새해에도 건강하게 늙기를) “위하여”라며 건배했다.

나흘 후 새해가 되면 또 한 살 늙는다. 하지만 해가 바뀌어서 늙는 건 아니다. 옷은 안 입고 놔두면 만년 새 옷이지만 생물인 인체는 저절로 후패한다. 꼼짝 않고 ‘방콕’하면 더 빨리 퇴화한다. 사람은 누구나 한 평생 생로병사(生老病死)네 가지 고통을 겪지만 그중 老와 病은 타협할 여지가 있다. 2023년 계묘년엔 본보 독자 어르신들 모두 늙는 고통 없이 토끼처럼 몸이 발랄하고 민첩해지시기를 기원한다.

<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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