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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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야 가라(‘Ni-A-Gara’)

2022-12-25 (일) 윤영순 / 우드스톡,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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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은 느린 듯 하면서도 빠른 속도로 가랑비에 속옷 젖듯 햇수를 더하며 찾아 들고, 부지불식간에 노인의 대열에 들어서게 된다. 중년이 깊어지자 온갖 세상 때 묻은 고민들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잡더니 어느새 머릿결 속에 새치가 눈엣 가시처럼 늘어나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 밑이 “아야” 소리 날 때까지 한 웅큼 뽑아도 보았다.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예의 바른 학생들이 자리를 양보해 주기 전에 얼른 염색이라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때쯤일 것이다.

그로부터 시작된 염색과 파마는 쉬지 않고 장장 30여 년을 혹사시킨 탓인지 부실한 머리카락은 머리 정수리부터 엉성해지고 빠지기 시작하는 데는 속수무책이다. 이따금 피부에 부작용이 보일 때도 힘 없고 실낱같은 머리카락을 달래며 차일피일 미루어 오길 몇 년을 보냈을까? 드디어 기회는 왔다. 3년여의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집안에서 보내는 날들이 많아지자 이참에 지겨운 염색과 파마는 자신과의 약속이행 차원에서라도 번거롭게 미장원을 들락일 필요 없이 자연 그대로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길렀더니 어느새 거울 속 내 모습은 완전 로맨스 그레이의 외모로 바뀌어 버렸다.

지금은 흰 머리 단발 소녀 같은 모양새로, 그러나 다소나마 노인티를 내지 않으려, 옷과 외모에 신경을 쓰고 있다. 몇 년 만에 만나는 끼리끼리 모이는 라인댄스 동아리 회원들이 의외로 몰려와 흰 머리에 관심을 보이는데, 그중 한 회원이 “젊었을 때는 예쁘다는 소리 많이 들었겠어요”라고 추켜세운다. 흰 머리칼이 어울린다는 뜻이려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 하지만 “젊었을 때는”라는 단서에 못내 서글퍼짐은 어쩔 수 없다.


결코 바람직한 추세는 아니지만 젊은 세대가 먹여 살려야 하는 노인 인구가 점점 불어나는 상황에서 장차 수명이 길어지는 백세 시대를 맞으면 세상은 또 어떻게 변모할까? 어림잡아 노인의 기준을 남성 70세로, 여성 73세로, 개인의 건강상, 또 인지 능력상, 의술 발달 등 여러 요인으로 10세 정도는 낮추어 늙음의 정의를 바꾼다 해도 그렇지….
겨울의 희뿌연 날씨가 침침한 눈을 더욱 흐리게 하는데 저녁 먹고 매일 하는 칫솔질 후 워터픽까지 마무리하고 나와 몇 시쯤 되었나 무심히 시계를 보니 낮 2시를 가리킨다.

깜짝 놀라 안방과 거실 심지어 부엌까지 들락거리며 시계란 기계를 죄다 들여다보아도 똑같다. 아니, 그사이 나 몰래 전기가 나갔었나 하면서, 마지막으로 정전과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자, 이것도 역시나다. 잠시 정신이 멍해지는데, 마침 부엌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점심 후에 저녁상에 올릴 메뉴로 갈치조림을 생각하며 손질해 둔 생선과 야채가 가지런히 보란 듯이 놓여있다.

저녁같이 음침한 흐린 겨울 날씨 탓인가, 며칠간 끙끙댄 몸살로 독한 약을 먹은 탓인가, 이래저래 헛웃음이 나온다. 그래, 좀 전에 점심을 먹고 돌아선지가 얼마인데 이건 분명 한 겨울의 짧아진 낮시간 탓으로 치부해 버린다 해도 마음속엔 ‘허허로움’이 남는다.

나는 과연 늙었을까? 다시 한번 스스로 반문하며 속으로나마 긍정의 힘을 끌어올려 본다. 아직도 나이보다 젊은 육체가 받쳐주고 있는 한, 그리고 나이와는 상관없이 현재를 열심히 살고 있는 한 늙음이란 없다는 생각으로 노래교실에서 배운 실력으로 트로트 한 곡, ‘나이야 가라’를 시원하게 뽑으면서 저녁을 맞는다. 저무는 2022년 한 해를 보내면서.

<윤영순 / 우드스톡,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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