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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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빚

2022-12-21 (수) 이재순 / 인디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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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마지막 달이다. 지나간 삶을 점검해 본다. 누군가의 가슴에 상처를 주었는지, 신세를 진 사람에게 보답을 했는지 생각해 본다. 얼핏 머리에 떠오여름 어느날 나는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손님을 기대하고 있지 않았는데 도어 벨이 울린다. 푸시시 일어나 문을 여니 그곳에는 사십대 여인과 고등학생 정도의 청년이 나를 반긴다. 도무지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어떻게 알고 있던 사람들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눈치챈 그녀는 밖에 세워둔 빨간 혼다 자동차를 가르치면서 아직도 그 차를 타고 다닌다며 크게 웃는다. 그 자동차는 10여년 전 우리가 그녀에게 선물했던 차였다. 그녀는 남편의 비서 샨드라였고 아들 브렌든이다.

샨드라는 늘 헤픈 웃음을 짓는 명랑한 여자였다. 같은 건물에서 꽃집을 경영하던 나는 그녀의 말 동무가 되어 주었다. 어려서 부모가 이혼을 했고 방탕스런 유년기를 보내면서 아이 둘을 낳았다고 했다. 그 애들은 남들에게 주고 현재의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다시 애 둘을 더 낳았다. 얼마후 술 중독인 남편과도 이혼을 하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애들을 혼자 키우고 있다고 했다.

남편과 나는 늘 그녀를 돕는데 앞장섰다. 크리스마스 전날 그녀는 애들에게 선물 살 돈이 없다고 우리 집을 찾아 오기도 했고 자동차 기름이 떨어 졌다고 하기도 했다. 겨울에 눈이 많아 학교가 문을 닫으면 그녀는 애들을 으레껏 내 꽃집으로 데려다 놓곤 하였다.
어느날 아침 그녀는 일찍 우리집에 전화를 했다. 자동차 사고로 자동차를 페차시켰다고 했다. 착한 남편은 그날 부터 그녀의 운전수 노릇을 했다.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살기에 아침저녁으로 그녀의 출퇴근을 도왔다. 그러던 중 큰아들이 우리가 대학때 사준 자동차를 돌려 주겠단다. 운 좋은 비서는 자동차가 생겼다. 고장난 곳을 고치고 기름을 한 탱크 채워 그녀에게 주었다. 그 자동차가 10년 후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그 애들을 돕고 싶었다. 어느날 그 애들과 약속을 했다. 성적표에 A 학점 받으면 하나에 5불씩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나의 행동이 바람직한 교육적인 것은 못된다 하더라도 그 애들에게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동기를 주고 싶었다. 그후로 몇번을 그 애들은 내게 성적표를 들고 와 돈을 받으며 밝게 웃으며 돌아간 기억이 있다.
그런 일은 그녀가 어느날 걸려온 전화에서 마지막 끝이 되고 말았다. 형무소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약물인지 알콜로 인한 사고였는지 나는 모른다. 남편은 더이상 그녀를 도울 수가 없다고 했다. 그애들 아버지는 애들 양육권을 맡았고 그녀는 얼마간 형무소 형을 치루었다고 했다. 그 일이 있던 게 10년 전이다.

그 후로 그녀는 다른 도시로 이사를 했단다. 우리가 그녀의 기억에 늘 부모님처럼 훈훈한 추억으로 남아 있었고 한번 찾아 고맙다는 말을 전할 겸 찾아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옆에 앉은 아들 자랑을 했다. 내가 A학점 하나에 5불씩 준 주인공이라고 했다. 어느새 그렇게도 건실하게 자랐구나! 그들이 떠날때 나는 비상금을 털어 브렌든과 악수 할 때 손에 쥐어 주었다. 놀라 거절하는 그에게 내가 약속한 A 학점에 대한 묵은 빚이니 주저 말고 받으라고 했다.

자동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하면서 그들이 잘 살아 주기를 바랬다. 인생은 지금부터이다. 무질서한 그녀의 과거를 들추지 말자. 용케도 버티며 살고 있다. 그날의 내 비상금은 묵은 빚 갚는데 더 없이 귀하게 쓰였음에 마음 흐뭇하였다.

<이재순 / 인디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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