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구월의 초가을은 ‘시월의 어느 멋진 날’을 꿈꾸게 했는데 막상 시월의 하늘이 열리자마자 날아든 노벨상 수상자 발표 소식은 날벼락처럼 우리를 움츠러들게 한다. 노벨상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 있어? 하면 그만이겠지만, 노벨상 앞에만 서면 넘사벽을 마주하듯 답답함이 밀려오고 뭉개진 민족적 자존심이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거린다.세계 인구의 0.2%인 유대인이 노벨상의 30% 이상을 휩쓴 것이라든지, 이웃나라 일본이 지금까지 총 29명의 수상자를 배출하며 국가별 종합순위 7위에 랭크되어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해방후 77년 동안 제 부문에서 약진을 거듭해 온 우리의 자부심이 유독 노벨상 앞에서는 맥을 못 추고 있으니 안타까움을 넘어 콤플렉스가 될 지경이다.
부끄러운 자화상이지만 2008년 일본이 4명의 기초과학부문 노벨상을 배출했을 때, 서울대학교에서 ‘노벨상 프로젝트’ 추진을 발표하고, 과학기술부도 200억원의 예산으로 해외의 다수 노벨 수상자와 석학을 국내대학에 초빙하여 세계수준의 연구중심대학(WCU)을 육성하겠다는 해결책들을 쏟아내며 언론도 이에 동조하고 모두 한껏 기대에 부풀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로부터 14년이 흘렀지만 노벨상은 찾아오지 않았다. 국가적 프로젝트를 통해 노벨상을 받으려는 발상은 그 시대니까 가능한 얘기이고, 한 때 그렇게라도 노력했었다는 추억일 뿐 오늘날 정서나 국민의 눈높이로 바라보면 코미디 같은 해프닝에 불과하다.
최근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비는 꾸준히 세계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중고등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수학, 과학 부문의 국제올림피아드 대회에서는 매년 최상위권을 놓치지 않는다. 특히 올해는 수학 부문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와 아동문학 노벨상으로 일컫는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이수지 작가를 비롯하여 반도체 산업의 리더로서 인터넷 강국인 우리나라가 음악, 영화, 드라마, 음식 부문에 이르기까지 세계시장에서 K-Culture(한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 문화가 이미 세계 속에 스며들었고 세계인은 대한민국을 문화강국으로 인정하는 흐름이 상당기간 진행되었는데, 정작 우리는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가운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결과에 더 놀라고 당황해했다. 이러한 성과는 여러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나타나기 마련이지만, 수수께끼 같은 우리 국민의 저력과 폭발력은 또 다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노벨상은 수상자를 선정할 때 남다른 기준과 이유를 갖고 있다. 단순히 생계나 부의 축적을 위한 기술 연마와 개발보다는, 새로운 것을 발견 또는 발명하여 지식을 확장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하는 등 인류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을 선정하며, 한두 개의 논문이나 작품으로 즉각적인 반응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축적된 결과물이 확실하게 증명된 후에 수여된다. 또한 노벨상이 세계 최고의 권위를 갖게 된 데에는 인류애라는 보편적 가치를 바탕에 두고 122년 동안 면면히 이어온 전통과 역사에 기인한다.
노벨상이 개인에게는 큰 영예이고 국가적으로도 대단한 영광이지만 목적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더군다나 벼락치기로 공부하여 치르는 시험도 아니다. 담담히 각자 하고 있는 분야에서 사사로운 작은 이익이 아닌, 보다 큰 가치를 위해 도전하고, 사회적으로도 그런 분위기가 자연스레 조성될 때, 노벨상은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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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김 전 재미부동산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