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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맞서는 ‘생명파’와 ‘선택파’

2022-10-25 (화) 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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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서울 광화문과 용산 일대에서 보수-진보 양 진영의 대결시위가 벌어졌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보수쪽은 “문재인, 이재명을 구속하라”고 외쳤고, 촛불 대신 노랑풍선을 든 진보쪽은 “윤석열 퇴진, 김건희 특검수사”를 외쳤다. 길거리의 패거리 이념대결을 일삼는 정치후진국답다며 혀를 찼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다. 민주주의 최선진국 미국에서도 길거리 이념대결은 흔히 보는 장면이다.

미국에선 툭하면 총기살상 사건이 터진다. 매일 평균 316명이 총에 맞고 그중 106명이 사망한다. 지난주에도 샌디에이고에서 한 남자가 경찰을 총격했다가 응사 받고 죽었다. 작년에 발생한 학교 총격사건만 249건이다. 총격사건이 터질 때마다 총기 규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지만 총기구입을 옹호하는 맞불시위가 늘 뒤따른다.

요즘 또 다른 이념대결이 미국을 달구고 있다. 낙태를 불법화(또는 제한)할 것인지, 아니면 사실상 합법인 현 상황을 유지할 것인지를 놓고 모든 유권자들과 정치·사회·종교단체들이 양분돼있다. 성조기와 촛불이 아닌 ‘생명파(pro-life)’와 ‘선택파(pro-choice)’다. 2주 앞으로 다가온 중간선거 출마자들이 어느 파를 표방하느냐에 따라 당락이 달라질 수 있다.


연방대법원은 1970년 소위 ‘로 대 웨이드(Roe vs Wade)’케이스 판결을 통해 당시 텍사스를 비롯한 일부 주들의 과격한 낙태금지법이 위헌이라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임신 첫 주기인 12주째까지는 낙태를 문제 삼지 않고, 둘째 주기인 13~28주에는 임신부의 건강상태를 고려해 낙태허용 여부를 결정하되 세 번째 주기인 29~40주에는 임신부의 생명이 위급하지 않는 한 낙태를 규제 또는 금지토록 했다.

대법원의 이 낙태합법 판결은 미국 여성들에게 임신중절수술 길을 사실상 터주었다. 원하는 여성은 낙태가 합법화된 주에 가서 시술을 받을 수 있다. 전국에서 연간 93만여 명이 낙태수술을 받는다. 임신부 5명 중 1명꼴이다. 20대 여성이 과반수를 차지한다. 전국에 가족계획협회(PP)클리닉 등 낙태전문 시술소가 1,680여개에 달한다.

하지만 지난 5월 경천동지할 일이 일어났다. 대법원이 7-2표결로 결정한 낙태합법 판결을 반세기만에 5-4의 표결로 뒤집을 것이며 이미 새뮤얼 앨리토 대법관이 판결문 초안을 작성했다고 정치전문 미디어 폴리티코가 폭로했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확정된 것이 아니라며 서둘러 진화했지만 중간선거를 의식하는 보수지역의 상당수 주의회들은 낙태를 제한하거나 아예 금지하는 주법을 추진하고 있다.

전국에서 낙태에 가장 적대적인 10개 주는 오클라호마·캔자스·루이지애나·아칸소·애리조나·사우스다코타·미시시피·조지아·미시간·펜실베이니아 순이다. 반면 낙태에 가장 호의적인 10개 주는 워싱턴·캘리포니아·버몬트·뉴저지·하와이·오리건·네바다·뉴욕·코네티컷·매사추세츠 순이다. 조지아주는 태아의 맥박이 전자기기로 감지되는 임신 6주 후의 태아는 인간으로 대우해 낙태를 금한다는 규정까지 두고 있다.

이미 낙태를 합법화한 캘리포니아주는 이번 선거에 헌법수정을 위한 주민발의안(프로포지션1)을 상정했다. 낙태와 피임 등 생식과 관련한 개인의 자유는 정부가 침해할 수 없는 기본권이라는 내용을 주 헌법에 첨가하기 위해서다. 민주당, 개빈 뉴섬 주지사, 캘리포니아 의사협회와 간호사협회, 가족계획협회 등이 이 발의안을 지지하는 반면, 공화당, 종교단체와 생명파 시민단체 등은 이를 극력 반대하고 있다.

전국적 여론은 선택파 쪽으로 기울고 있다. 퓨 리서치 조사에서 응답자의 59%가 낙태합법화를 지지했고, 워싱턴포스트-ABC 여론조사에서도 응답자의 60%가‘로 대 웨이드’의 본래 판결이 유지돼야한다고 주장했다.

낙태가 불법인 한국은 시술통계가 없다. 보건복지부가 17년 전(2005년) 발표한 34만2,000여건이 ‘최신 집계’다. 이젠 연간 50여만 건까지 늘어났을 것으로 의료계는 추정한다. ‘인구절벽’에 몰려 지난해 9만여 인구가 줄어든 한국으로선 무시 못 할 숫자다. 태극기-촛불 시위대가 ‘윤석열 퇴진’이나 ‘이재명 구속’보다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을 환경을 조성하라”는 피킷을 들고 함께 시위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

<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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