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창] 가을, 정원의 시작

2022-10-12 (수) 박명혜 (전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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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을 기다려 구근을 거두고 심었다. 화분 하나로 시작한 다알리아는 몇 해 만에 제법 알뿌리를 늘려, 올해는 틀밭 하나를 비워 심었었다. 이른 여름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더니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오랫동안 꽃을 피웠다. 꽃송이도 탐스러워 몇 송이만으로도 주둥이 큰 꽃병도 가득 채울 만큼 풍성한 꽃이라 좋았다. 구근도 다른 것들에 비해 컸다. 감자를 파듯, 모종삽 깊게 넣어 파낸 다알리아 구근을 며칠 그늘에 말려 내년 봄, 다시 심을 때까진 겨울잠을 재운다. 반면에 다른 구근들은 잠 깨워 심을 시기가 또 지금 10월이다. 무채색 정원에 샛노란 꽃을 피워 봄을 알리는 수선화, 올해는 지난해 정원에서 수확한 구근으로 화분도 몇 개 만들었다. 키 작은 무스카리는 올해 첫 도전이다. 단풍나무 아래 헝클어진 머리처럼 넓게 퍼진 민트를 정리하고 무스카리를 줄 맞춰 심었다. 늘 키우기 쉽지 않다 여기는 튜울립도 심었다. 새 알뿌리를 심으면 다음 해 꽃을 보기는 하는데 생각만큼 예쁜 꽃송이가 피지 않을 때도 있고, 다시 알뿌리를 얻기도 쉽지 않아 매년 망설이곤 했는데 올해 다시 도전했다. 다른 것들에 비해 일찍 싹을 틔우는 향기 좋은 프리지아도 크고, 작은 화분에 나눠 심었다. 이렇게 몇 날을 구근 심으며 내년 봄을 준비했다.

가을 시작, 10월을 기다려 씨앗을 모으고, 또 심었다. 깻잎 씨를 모으고, 메리골드(Marigold), 나팔꽃 씨를 내년 봄을 위해 받아 두었다. 그리고 씨까지 받아 정리한 밭엔 쑥갓, 아루굴라, 래디쉬 같은 가을 채소 씨앗을 뿌렸다. 가을이 때론 봄보다 발아 온도가 좋아 습도만 잘 유지 시켜주면 성공 확률은 더 높다. 특히 캘리포니아는 가을을 두 번째 봄이라 할 만큼 날씨가 좋다. 게다가 겨울 장마가 있지만 추위가 심하지 않아, 가을 채소 말고도 금잔화(Calendula), 꽃양귀비(Iceland poppy), 팬지(Pansy) 같은 꽃씨도 오히려 봄보다 가을에 발아시켜 온실에서 키워 정원에 옮기면, 5, 6월 훨씬 풍성한 정원을 만들 수 있다. 그 봄을 상상하며 또 몇 날을 꼬박 앉아 씨앗을 심었다.

가을이어야만 얻을 수 있는 낙엽. 이 또한 새봄을 위해 준비하는 한 가지다. 마른 낙엽은 나무가 뿌리를 통해 흡수하는 탄소와 무기질 영양소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귀중한 천연 정원 비료다. 그러니 이 가을, 뒹구는 낙엽 내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 토양에 쉽게 분해 되도록 잘게 부수어 정원 곳곳에 나눈다.

이 모든 일들이 가을에 이루어진다. 그러니 파릇파릇한 새싹 빼꼼히 고개 내미는 봄이 정원의 시작 같지만, 진정한 정원의 시작은 가을이다.

<박명혜 (전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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