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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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념의 반문화

2022-09-29 (목) 김욱진 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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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정 부분 사이보그가 되었다. 얼마 전 스마트폰을 세울 수 있는 동그란 고리를 부착하고 나서는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맨몸으로 걸을 때도 전화기는 챙긴다. 지갑은 빠뜨려도 휴대용 무선단말기는 챙겨야 안심이다. 강력한 접착력을 자랑하는 스마트폰 고리에 손가락을 끼우고 걷는다. 인체공학적 디자인을 자랑하는 기기는 어느새 내 몸의 일부가 되어있다. 뜨끔한 마음에 내 손을 응시한다. 스마트폰이 태연한 얼굴로 내게 반문한다. “나를 선택한 건 바로 너야. 나는 너의 개인용 디지털 조력자에 불과해.”

스마트폰을 이름 그대로 똑똑한 조수나 비서 정도로 여기고 싶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초연결의 시대, 나는 기기를 요령껏 활용할 만한 주체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전화기를 사용한다고 믿고 싶지만 그동안 주입된 가치를 부정하지 못하겠다. 누군가는 그걸 광고나 홍보라고 부를 것이다. 10년 넘게 스마트폰의 아이콘으로 자리한 한 제조사의 유명한 슬로건을 떠올린다. ‘다름을 생각하라(Think Different)’ 스마트폰이 주류가 된 시대에 다름이란 무엇일까. 경쟁사의 운영체제인 안드로이드를 생각하라는 의미일까. 아니면 자신들이 팔고 있는 문명화된 기기를 거부하고 디지털 러다이트 운동이라도 벌여야 한다는 뜻일까.

실리콘밸리가 내세우는 혁신의 뿌리는 저항정신과 반문화(counter culture)에 있다. 1950년대 비트세대의 저항정신과 6-70년대 히피가 추구한 반문화는 고스란히 정보통신 혁명의 토대가 되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다름을 생각하라’는 슬로건이 이를 증명한다. 혁신은 남다른 생각을 바탕으로 색다른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드는 일이다. 따라서 혁신은 주류가 된 통념을 거부할 때 태동한다. 태생적으로 반문화적인 것이다. 반문화를 대표하는 미국의 소설가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은 “가장자리에서는 중심에서 볼 수 없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꿈에도 생각 못한, 큰 것들을, 가장자리에 선 사람들이 맨 처음 발견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혁신의 출발점은 중심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있다.


실리콘밸리에 오고 나서 오랫동안 품었던 의문은 ‘이제는 주류가 된 혁신기업이 계속 가장자리에 서있는가’였다. 사실상 24시간 접속해 테크기업의 서비스를 이용하는데도 어쩐지 삶이 풍성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는 없었다. 아니, 깊어진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는 표현이 보다 적확할 것이다. 고민이 깊어지던 차에 반가운 책 하나를 발견했다. 피트 데이비스의 ‘전념’이다. 데이비스는 자신의 하버드 법학대학원 졸업 연설에서 발표한 ‘전념하기의 반문화(A counterculture of commitment)’가 반응을 얻자 이를 파고들어 책으로 펴냈다. 그는 현대사회에서 무한탐색과 끊임없는 접속을 벗어나 하나에 전념하는 것을 ‘반문화적’ 행위로 규정했다. 그는 우리가 “삶의 길이는 어찌할 수 없어도 삶의 깊이는 통제할 수 있다”며 반문화적 행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실리콘밸리답다’는 것은 가장자리에서 중심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실리콘밸리의 바탕인 반문화적 시각에 따라 주류가 된 테크기업의 서비스도 주체적으로 판단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동안 나는 하나에 몰두하지 못하고 온라인 공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서성거렸다. 무수히 자책하면서도 실리콘밸리에서는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강박이 있었다. ‘전념’을 읽고 조금은 자유로워졌다. 하루의 일정 시간은 연결과 접속을 벗어나 무언가에 전념하기로 마음먹었다. 언제가 좋을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새벽시간을 다시 확보해야겠다. 일어나면 어둠과 고요 속에서 걸으며 명상을 시도해야겠다. 아무도 없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일기를 써야겠다. 현시대의 유행과 시류에 동떨어진 방식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반문화가 실리콘밸리를 낳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일깨우며 감히 이를 ‘전념의 반문화’라고 일컫는다.

<김욱진 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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