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창] 느리게 본 영화

2022-09-28 (수) 박명혜 (전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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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없는 숲에 기쁨이 있고/ 외로운 바닷가에 황홀함이 있고/ 깊은 바다 곁 그 함성 속에 음악이 있으니 / 나는 사람을 덜 사랑하기보다 자연을 더 사랑하리라.

넷플릭스에서 신작을 찾다가 우연히 오래 된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The bridges of Madison county)를 다시 봤다. 영화 속에 바이런의 이 시 “길 없는 숲에 기쁨이 있고(There is a pleasure in the pathless woods)”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가였던 남자 주인공의 사진집 “Four days” 첫 페이지에 씌여 있던 시다. 이 영화는 내가 손가락으로 꼽는 애착 영화는 아니지만, 보기는 꽤 여러 번 본 영화다. 그랬는데도 이 시는 이번에야 발견했다.

20대에 이 영화를 처음 보았다. 아마도 그땐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이라는 유명 배우가 주인공인 영화여서 봤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이후에 몇 번은 사람들의 높은 평가 때문에 다시 보기를 했었다. 볼 때마다 분명 처음과는 달랐고, 뭔가 다른 감동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 같지는 않았다. 오늘처럼 바이런의 시가 보이지도 않았고, 고마움을 풀꽃 다발로 선물할 줄 아는 남자와 또 길에 지천인 풀꽃 선물에 진정 행복해하는 여자의 모습도 깊이 기억되지 않았다. 왜였을까? 중년, 상큼할 것도 없는 그들의 사랑, 그것도 불륜이라는 소재가 달라진 것도 아닌데, 왜 오늘 더 특별했을까? 그건 아마도 내가 주인공들과 비슷한 나이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지 싶다. 부모님이, 책이 그리고 유명한 사람들이 미리 살아보고 알려 준 인생의 팁들도 내가 살아 봐야, 겪어보니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처럼 이만큼 살아보니 사람들 사는 모습이 더 넓게 보이고 그래서 오늘 이 영화도 또 다르게 볼 수 있었으리라.

사방이 옥수수밭으로 펼쳐져 어쩌면 너무나 단조로운 그 풍경이, 달리면 차 꽁무니를 따라 달리는 비포장 도로의 먼지가, 빛바랜 다리의 경치가 이 계절과 닮아서 좋았다. 자글거리는 라디오에서 흐르는 음악과 꽃무늬 벽지를 두른 부엌은 마음 편히 속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또 좋았다. 서럽게 내리던 가을비 속에서 한마디 말도 없이 비를 맞는 남자와 그를 보며 울음 꼭 참던 여자의 서러움이 오랜만에 건조한 내 마음까지 촉촉하게 해주니 그도 나쁘지 않았다. 재즈와 블루스, 영화 속 음악이 좋아서, 시처럼 아름다운 대사를 새겨듣고 싶어서, 여러 번 멈춰가며 2시간 남짓한 길이의 영화를 4시간 동안 느리게 보았다. 참 좋았다.

<박명혜 (전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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