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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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각 - 호박잎 사랑

2022-09-07 (수) 방인숙/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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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봄에는 으레 쑥국을 먹어 줘야한다. 이어서 기름에 지진 두부에 달래간장을 고명으로 해서 먹는 게 나 나름대로의 연례 봄 행사다. 그러다 여름이 되면 복날에 삼계탕 찾듯 꼭 먹고 넘어가야 하는 음식이 있다. 바로 호박잎쌈이다.

동생도 호박잎을 좋아하는 걸로 보아 집안내력이다. 할머니와 엄마가 유난히 호박잎쌈을 즐기셨던 탓에, 먹고 자란 우리들은 호박잎의 진미를 안다. 두 분이 떠나신지 어느덧 할머니는 37년, 엄마는 20년이 됐어도 애모여일(哀慕如一)이다. 그래선지 호박잎을 못 먹은 채 여름을 보내면 독감주사를 안 맞은 듯 허하다. 늘상 두 분에 대한 그리움이 애틋해서겠다.

그지없이 소박하고 흔한 호박잎 먹기야 ‘누워 떡먹기지’ 하겠지만 그게 아니다. 호박잎이 인기가 없는지 슈퍼에서 잠깐 선만 보이곤 싹 자취를 감춘다. 그러니 언제 등장할지도 모르고, 슈퍼도 자주 안 가는 편인 내가 호박잎과 조우하기는, 거의 별 따기다.


뉴욕에서 사는 37년 동안 슈퍼에서 호박잎과 마주친 적이 딱 두 번 밖에 없을 정도니까. 그렇다고 텃밭도 없다보니 호박잎 자급자족은 언감생심(焉敢生心)! 기껏 화분에다 고추, 가지, 오이만 네 포기씩 심지만 열매수확이 맛 뵈기 수준이라 관상용에 가깝다. 호박은 화분을 싫어하는지, 열매까진 안 바라도 성장마저 멈추니 호박잎은 깨끗이 포기다.

그래도 곰곰 회고해보니, 남새밭을 가진 정 많고 따스한 지인들이 항상 주변에 서너 명 있었다. 해서 참나물을 위시해 상추, 오이, 가지, 고추, 호박 등 공들여 농사지은 것들을 아낌없이 불하해주었다. 덕분에 귀한 무공해식품들로 늘 여름식탁이 풍성해지곤 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또한 32년 전에 만난 수호천사 같은 친구도 텃밭관리자다. 뭐든지 베풀려는 그녀는, 내 여행길에 비행기 안에서 먹을 간식까지 챙겨줄 만큼 다정하다. 유일하게 내 호박잎 짝사랑을 아는 그녀가 모른 체 할 리가 없다. 하여간 매년 30년 가까이 한 해도 안 거르고 호박잎과 고춧잎을 공급해준다, 금년에도 모기에게 뜯기면서 애호박과 호박잎을 뜯어줬다.
튼실한 잎줄기는 된장찌개에 넣고 호박잎은 살짝 쪘다. 토양이 달라선지 옛날 신토불이 호박잎과는 좀 다르다. 혀에 와 닿는 감촉이 좀 까슬까슬하고 덜 구수하달까! 그래도 친구의 정성과 마음이 담겨선지 1년 만에 먹는 맛이 그지없이 새롭다. 어느 광고마냥, “음! 이 맛이야!” 소리가 함박미소에 실려 절로 나온다. 하도 맛있어서 딸에게도 맛을 전수하고자 좀 남겼다.

며칠 후, 딸이 와서 삼겹살을 깻잎과 상추에 싸서 볼이 볼록하도록 먹기에 호박잎을 권했다. 호박잎의 사연을 들려주면서 눈치를 보니, 딸의 입맛엔 ‘괜찮다’ 정도다 역시 삼겹살과 천생연분인 깻잎엔 역부족이다.

딸의 손이 연신 깻잎으로만 간다. 약간 서운하지만 수긍이 간다. 나처럼 할머니와 엄마의 기억이 배어있지 않으니까. 32년 동안 한결같은 친구의 사랑 맛을 느끼지 못해서니까. 말을 물가로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여줄 수는 없다더니...

그래도 먼 훗날, 엄마의 호박잎사랑이 그리워져, 호박잎의 진가를 재인식하기를 소망할 뿐이다.

<방인숙/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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