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창] 청첩장을 핑계 삼아

2022-09-06 (화) 이수진(프리랜서 작가)
작게 크게
86년생 호랑이띠인 나는 2022년 임인년(壬寅年) 10월, 햇살 같은 사람을 만나 한국에서 늦깎이 결혼식을 준비 중이다.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뒤로부터 숨을 쉴 틈도 없이 둘이서 플라워 업체를 선정하고, 케이터링 업체와 만나 메뉴를 정하고, 셀프 웨딩 촬영을 마치고, 반지와 목걸이를 함께 고르고, 헤어와 메이크업 샵을 정했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결정들이 밀물처럼 들이닥치는 바람에 정작 하객을 위한 청첩장을 만드는 일은 늘 맨 뒤에서 눈치만 보고 있는 소극적인 아이처럼 귀찮은 숙제가 되어버렸다. 더는 미룰 수 없을 것 같아 겨우 마음을 다잡고 제작한 청첩장이 도착하고 나서야 우리는 가까운 지인들과 가족들에게 점심 또는 저녁 한 끼를 대접하며 슬그머니 결혼의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막상 해보니 내가 먼저 연락하고 약속을 잡고 청첩장을 내밀며 결밍아웃(결혼한다는 말로 타인을 깜짝 놀라게 하기!)을 한다는 것은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특히 미국의 결혼식 문화에 조금 더 익숙한 나로서는 한국의 강한 축의금의 문화가 많이 어색했고, 마치 결혼식에 초대하는 것이 곧 축의금을 내러 와달라는 의미로만 비칠까 걱정이 앞섰다. 심지어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하고 싶은 친한 친구들이 해외에 살거나, 꼭 와주었으면 하는 분들이 일정상 참석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그들에게 청첩장을 보내는 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고민은 더 깊어졌다.

하지만 청첩장의 참 의미는 결코 축의금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살아오며 수많은 사람의 사랑을 통해 성장해 온 우리가 죽음으로도 깰 수 없는 둘만의 약속을 함께하는 날, 나를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증인이 되어주고 우리의 앞날을 응원해주기를 부탁하는 의미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9살 때부터 붙어다녀 이제는 가족이라고 부르는 게 더 쉬운 나의 소중한 두 친구 가족들을 선두로, 나의 이모 삼촌들과 사촌 언니 오빠들, 신랑의 5년 지기 농구팀원들, 나의 대학 시절의 친구들과 교회 친구들, 신랑의 고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일하는 동료들, 나의 옛 직장 동료들과 현 직장 동료들, 바로 그들이 그랬다. 적재적소 하게 우리의 삶에 들어와 어깨를 내어주고, 토닥여주고, 심심한 시간을 함께 보내주고, 함께 웃고 울다가, 또 시간이 되면 잠시 헤어지고 만나고를 반복해 왔던, 고맙고도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청첩장을 핑계 삼아 귀한 인연들의 안부를 한 번 더 묻고, 내 인생의 단짝을 소개해주고, 밥 한 끼를 대접하는 것을 반복하며 그 어느 때보다 더 풍요롭게 우리의 삶이 새롭게 빚어지는 것을 느끼는 요즘이다.

<이수진(프리랜서 작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