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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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구한말의 증인들

2022-08-15 (월) 정혜선(몬트레이 국방외국어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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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군 학생들한테 광복절을 가르칠 때마다 각 한자음절의 뜻을 따라 “빛이 돌아온 날”이라고 설명해준다. 이번 77주년 광복절에 나는 특별히 기억하고 싶은 분들이 두 분 계시다. 한 분은 7월 말에 돌아가신 혈맹단 승병일 애국지사신데,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한국인 미술작가 1호인 승지민, 내 대학 과동문의 아버지이시기도 하다. 오산 중학교 시절, 17세라는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친구들과 혈맹단이라는 항일단체를 조직해 활동하시다가 감옥에서 고문까지 받으셨고 창단 회원들 7명 중에서 가장 오래 사셨다. 2020년 10월에 출연하신 ‘유퀴즈 온 더 블럭’ 프로그램 영상을 보면 일제 강점기 때 조선사람들은 사람이 아니고 노예, 짐승 같은 존재였다고 그래서 나라가 당신 목숨보다 위에 있었다고 회고하시는 모습이 심금을 울린다.

또 한 분은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일제 강점기 마지막 주한 미 총영사였던 O. 게이로드 마쉬(O. Gaylord Marsh)씨다. 인터넷 기록에 의하면 1938년에 주한 미 총영사로 재임하셨다고 한다. 이 분은 내가 2011년 9월 카멜 밸리(Carmel Valley)에서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박물관에서 열릴 조선 분청사기전에 대한 영어 강연 후 이 분의 며느리신 패트리샤 앤롤프(Patricia Anloff) 여사님이 보여주신 앨범으로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이 앨범에는 일제강점기 마지막 주한 미 총영사님께서 곧 말살될 한국문화를 기록해두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찍은 당시 한국인들의 일상문화에 대한 사진들과 그 사진들을 보고 부인이 그린 유화들이 정갈하게 타자로 친 설명문들과 함께 붙어 있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박물관 한국 미술 큐레이터였던 과후배, 김현정씨는 내 얘기를 듣고 함께 앤롤프 여사님 댁을 방문하여, 이 앨범의 사료적 가치를 확인해주었다. 외국인의 시각에서 한국을 긍정적으로 관찰한 귀중한 구한말 사료라는 것이다. 그리고 2019년 3월 19일에 드디어 박준용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님께서 앤롤프 여사 댁을 방문하셔서 여사님께 감사패를 증정하심으로써 인도주의적인 미국인 외교관의 문화보존 기록이 한국정부에 공식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우연히 발견된 보물처럼, 미처 몰랐던 아주 가까운 곳에서 알게 된 승병일 애국지사와 O. 게이로드 마쉬 미 총영사님은 나에게 국민의 인간 존엄성 회복과 고유한 문화 보존이 나라의 생명이요, 애국하는 이유임을 남다른 방식으로 일깨워주셨다. “빛이 돌아온 날”에 숨을 마음껏 쉴 수 있었던 그날의 감격을 되새기면서, 한국의 모든 이들이, 그 빛 속에서 세상 끝날까지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정혜선(몬트레이 국방외국어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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