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창] 정원사의 열두 달

2022-08-10 (수) 박명혜 (전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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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게 없어도 기분 전환 삼아 들리는 홈구즈(HomeGoods). 그곳은 벌써 할로윈 장식품으로 가득했다. 아직도 여름이 한창인데 선반 가득가득 호박과 단풍, 기괴한 모습의 마당 장식품들까지 그곳은 벌써 10월, 가을 끝이다. 더워 죽겠다 싶은데 또 어느 곳에선 조용히 새 계절이 준비되고 있는 것이다.

정원을 가꾸는 것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아름다움을 위해선 지난 가을 가지도 쳐 주어야 했고, 거름도 하고, 약도 쳐 주어야 했으니 앞서 계절을 준비하기로는 이만한 것도 없지 싶다.

그중에서도 두 계절, 아니 일 년을 앞선 나의 가드닝 방법이 있다. 바로 철 지난 식물을 사는 것이다. 진열대를 내려와 빨갛고 노란 꽃 대신, 마른 가지에 할인 폭만큼의 알록달록한 가격표를 단 철 지난 식물들. 상태가 그리 좋지 않더라도 열정 있는 가드너를 만나면 충분히 신상 못지않은 기쁨을 얻을 수 있다. 한 4~5년쯤 되었을까? 그날도 매의 눈으로 가장 싱싱한 화분을 골라 계산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 앞사람 카트엔 시든 잎이 잔뜩인 화분이 가득한 게 아닌가! 뭐지 이 사람? 나의 궁금증에 카트의 주인은 “죽어 가는 것을 살려내 가꾸는 진정한 정원사(Green Thumb)”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짧은 대화였지만 그이의 자신감이 꽤나 멋지게 느껴지기도 했고, 할인이라는 매력도 놓칠 수 없어 그날 이후 나도 그곳에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무리 가격이 싸다 해도 정성스러운 진열도 없고, 꺾이고, 마른 화분들에 정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나 하고 가져온 수국이 다음 해 탐스런 꽃망울을 피우고부턴 기쁨으로 찾는 곳이 되었다.


오늘은 장미가 많았다. 상태는 나쁘지 않았는데 대부분 애매한 꽃 색깔 때문에 팔리지 않다가 이리로 왔지 싶다. 잎에 병이 잔뜩 든 복숭아와 화분 밖으로 삐져나온 뿌리까지 바짝 마른 살구나무도 있었는데 혹시 누가 잘못 사 갈까 조금 더 구석으로 밀어 두었다. 꽃이 감자꽃을 닮았다 이름 붙여진 솔라늄(Bule potato bush), 일 년생이지만 잘 기르면 여러 해 두고 볼 수 있는 채송화(Rose moss), 패랭이꽃(China pink)도 보이고, 이 코너에서 팔기엔 상태가 너무 좋은 라벤더(Lavender)도 꽤 많았다.

눈이 반짝, 마음은 콩닥 흥분되지만 이젠 할인된 화분을 살 때 나름 요령도 있다. 일단 화분을 뒤집어 봐야 한다. 잎이 나빠 보이지 않아도 뒤집어 봤을 때 뿌리가 실하지 않으면 카트에 올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꼭 한 번 자신의 정원을 떠올려 필요한 것인지, 심을 곳은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좋은 정원사는 충동구매를 하지 않는다.

<박명혜 (전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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