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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안전

2022-07-20 (수) 석인희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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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휴가를 맞아 최근 한국에 다녀왔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몇 년 만에 방문한 한국은 여러가지 면에서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무엇보다도 방문 기간 동안 한국의 ‘안전’에 대해 감탄하게 됐는데, 코로나19 사태 속 미국에서 끊임없이 범죄 소식에 시달려온 탓에 안전함이 삶의 우선 가치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한국은 늦은 밤 시간에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녀도 전혀 공포감이 엄습하지 않았다. 총을 맞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낄 필요도 없었고, 대마초 냄새를 맡을 일도 없었다. 게다가 길거리를 걸으며 증오범죄의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어깨를 움츠리지 않아도 됐다. 10년 넘게 미국에 거주하며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던 어깨는 한국에 가서야 힘이 빠졌다. 아, 이곳이 바로 내 고국이구나.

미국에 살면서 안전 문제에 대해 부쩍 노심초사하게 된 건 기자생활을 시작한 이후부터다.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서 공부했을 때만 하더라도 미국이 위험하다는 생각을 크게 하지 않았다. 학교 캠퍼스는 비교적 안전한 장소이기도 했고, 20대의 패기로 주변에 도사린 위험에 대해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았다.


그러다 미국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각종 총기, 마약, 강도, 폭력, 증오범죄 사건들에 노출됐고, 그제서야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인지했다. 특히 팬데믹 시기에는 아시안 주민들을 향한 분노가 여기저기에 도사리고 있어 언제 어디서 피해자가 될지 몰랐다. 그저 무탈하게 가족, 친구, 지인들이 이 고단한 시기를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전 세계적으로 복합적인 경제 위기가 불어 닥친 올해에는 도둑, 강도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한인들도 다수 거주하는 LA 카운티 밸리 지역의 한 게이티드 커뮤니티에서는 새벽 시간에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문이 잠겼는지 확인하는 괴한의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본보 6월13일자 보도>

밸리 지역 주민들이 가입한 페이스북의 한 비공개 그룹 계정에는 지난달 사진과 함께 경고의 글이 담긴 포스팅이 게시됐다. 해당 게시글에는 입고 있던 셔츠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낯선 남성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글쓴이는 ‘경고. 한 남성이 새벽 4시에 프론트 도어를 열려고 시도하는 모습이 설치해둔 보안 ‘링’ 카메라에 찍혔다’며 주민들에게 매일 밤 집 문을 잠갔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실제로 건너건너 아는 지인의 주택에는 지난 독립기념일 도둑이 침입했다. 가족들이 불꽃놀이를 구경간 틈을 타서 도둑이 유리창을 깨고 집안에 침입해 고가 물건들을 훔쳐갔다고 한다. 불과 한 두 시간 내로 벌어진 일이었다. 게이티드 커뮤니티에 위치한 집인 데다가 문을 잠그고 외출했음에도 불구하고 강도 피해를 당하자 집주인이 느낀 감정은 허망감 그 자체였다. 그는 “내가 더 이상 무엇을 더 조심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그런가 하면 수많은 주민들이 경제고에 시달리고 있는 현 상황에서 또다른 생계형 범죄도 기승을 부렸다. 주차된 차량 연료탱크에서 개솔린을 훔쳐 달아나거나,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주민들이 뒷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을 훔쳐 달아나는 강도 범죄가 증가했다.

한 예로 웨스트 할리웃 지역에서는 휴대폰 소매치기가 극성을 부리고 있는데, 뒷주머니에 휴대폰을 넣고 다니다 강도의 표적이 된 주민들이 다수 발생했다. 소매치기범들은 주로 한 팀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분석됐다.

반면 어디에나 CCTV가 설치돼 있는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로 꼽히곤 한다. 그래서인지 카페에 가면 자리를 맡기 위해 지갑, 휴대폰을 서슴없이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카운터에 주문하러 가는 사람들의 광경을 목격하는 일이 잦았다. 물품을 도난 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없어야 가능한 일. 이번 여행에서는 한국인들의 안전불감증이 괜스레 부러웠다

<석인희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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