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의 론 디샌티스 주지사는 공화당에서 현재 가장 빠르게 떠오르고 있는 스타 정치인이다. 2017년 트럼프의 후광을 업고 플로리다 주지사에 당선됐던 디샌티스는 2024년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를 위협하는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했다. 모든 여론조사에서 트럼프의 뒤를 바짝 뒤쫓고 있다. 디샌티스를 “훌륭한 젊은 지도자이며 미국을 사랑하는 진정한 투사”라고 치켜세웠던 트럼프가 그의 높은 인기에 위협을 느꼈는지 지금은 “그는 카리스마가 없고 멍청하다”며 깎아 내리기에 열심이다.
디샌티스가 정치적 자산을 쌓고 있는 방식은 간단하다. ‘문화전쟁’(culture war)의 촉발과 확전이 그것이다. 그는 보수층, 특히 극우의 표심을 자극하고 결집시킬만한 이슈들을 계속 재생산해내는 방식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 있다.
지난 1991년 ‘문화전쟁’이란 단어를 처음으로 대중화시켰던 사회학자 제임스 헌터는 낙태와 총기소지, 동성애, 종교와 정치의 분리 같은 ‘핫 버튼들’(hot buttons)을 둘러싸고 미국사회가 둘로 쪼개져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고 분석했다. 디샌티스는 ‘비판적 인종이론’과 어린 학생들에 대한 동성애 교육을 금지 시키는 등 핫 버튼을 끊임없이 눌러대면서 ‘문화전쟁’의 확전을 시도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문화전쟁’에서는 보수가 진보에 우위를 점해왔다. 디샌티스가 그렇듯 공화당은 ‘문화전쟁’에 아주 능수능란하다. 보수우파는 도덕적^문화적 분노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방식으로 정치적 에너지를 만들어 간다. 민주당이 기득권층에 집중하느라 노동계층과 적절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이 공화당은 이들의 불안과 분노를 파고들었다. 그 결과 수많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공화당으로 돌아섰다. 2016년 트럼프 승리가 대표적인 실증 사례이다.
지난 수십 년간 치열하게 치러져온 ‘문화전쟁’에서 가장 중심적인 이슈가 돼 온 핫 버튼은 낙태이다. 사실 공화당에게 결정적으로 ‘문화전쟁’의 효용감을 안겨준 계기가 된 것도 다름 아닌 낙태 이슈였다. 오랜 세월 민주당의 아성이자 표밭이던 캔자스의 블루칼라 밀집 지역들이 1990년대부터 공화당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공화당이 낙태 반대를 내세우며 대대적으로 벌인 ‘문화전쟁’이 거둔 결과였다.
이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도덕적 이슈에 투사하면서 자신들의 곤고한 경제적 처지를 잠시 잊었다. 이후 캔자스는 급속히 보수화됐으며 지금은 미국에서 가장 가난하면서도 보수적인 곳이 됐다. 가난해질수록 더욱 보수화돼 온 캔자스는 “왜 노동자와 경제적 취약계층이 민주당에 등을 돌리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진보에 뼈아픈 교훈을 안겨준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진보의 미래는 어둡다.
그런데 지난 달 ‘임신중지권’을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49년 만에 깨는 연방대법원 판결 초안이 ‘폴리티코’에 공개되면서 낙태 이슈는 또 다시 미국 사회를 뒤흔드는 핫 버튼으로 떠올랐다. 조 바이든 대통령까지 나서 아직 선고되지도 않은 판단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이 문제는 11월 중간선거의 주요 쟁점으로 급부상했다. 민주당과 진보는 낙태를 정치쟁점화 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공화당과 보수를 상대로 대대적인 ‘문화전쟁’을 벌이겠다는 선전포고에 다름 아니다.
민주당이 판결문 유출을 계기로 낙태 이슈를 쟁점화 하고 있는 데는 내심 이 이슈가 중간선거를 앞두고 분위기 체인저가 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사실 이번 중간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참패가 예견돼 왔다. 인플레이션 등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고 바이든 지지율도 너무 낮은 데다 민주당 지지자들의 투표의향 비율이 공화당에 비해 너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낙태권 판결 초안이 공개되면서 민주당은 이것을 여성 권리에 대한 중대한 침해이며 그동안 미국사회가 쟁취해온 시민들의 권리가 위축되고 위협 받을 수 있다는 논리로 지지층, 특히 여성 유권자들의 결집과 투표를 유도하고 있다. ‘로 대 웨이드’ 판례에 대해 미국인들은 지속적으로 찬성 60% 반대 40%의 여론을 보여 왔다. 민주당으로서는 잘만하면 불리한 판세를 바꿀 수 있다고 계산할 만 하다. 여기에다 잇단 참사로 총기 문제가 이슈화 되면서 그동안 공화당 지지기반이 돼 왔던 교외지역 고학력 유권자들의 표심이 흔들리는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그런 만큼 낙태와 총기 이슈에 화력을 집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1990년대 보수의 ‘문화전쟁’에 가장 강력한 실탄이 돼주었던 이슈들이 이번 중간선거에서는 진보의 카드가 됐다. 선거가 ‘팩트의 싸움’이 아닌 ‘정체성의 싸움’이 된지는 오래다. 언론인 출신 역사학자인 리처드 셍크먼이 “선거에서는 언제나 넓은 붓질로 그림을 그리는 정치인들이 사실과 수치로 무장한 사람들보다 더 유리하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11월 ‘문화전쟁’의 결과가 벌써부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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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