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은 나라는 러시아다. 나치 독일군의 공격에 희생된 러시아인은 무려 2,700여만으로 집계된다.
때문에 나치 독일이 소비에트 연방(현 러시아연방의 전신)에게 무조건 항복을 한 날은 러시아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 그 날은 1945년 5월 9일로 러시아에서는 ‘승리의 날’로 불린다.
2022년 5월 9일, 러시아의 제2차 세계대전 승리 77주년이 되는 날 전 세계의 이목은 모스크바로 집중됐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식 전쟁선포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면서.
이와 함께 온갖 시나리오도 난무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특별 군사작전 이라고 했던 표현을 버리고 노골적으로 전쟁을 선언할 것이다’, ‘우크라이나 서부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몰도바로 전쟁은 확산될 것이다’ 등등.
그러나 우려했던 확전 포고는 없었다. 이날 전승절 열병식이 열린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선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입에선 우크라이나 사태의 책임을 미국과 서방에 돌리고 침공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독설만 쏟아졌다.
러시아는 19만여 명의 병력을 투입, 우크라이나 침공에 나섰다. 그러나 당초 목표인 수도 키이우 점령과 젤렌스키 정권전복에 실패했다. 또 2차 목표로 삼았던 동부 돈바스 지방과 우크라이나 남부 해안 지대의 완전 장악도 이루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전승일을 전후해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한 유화적 제스처를 기대했으나, 이와 관련된 발언도 없었고 푸틴이 직접 나서 전쟁 지속 의지만 밝힌 것이다.
“푸틴 연설에 (서방 당국이 예상한) 중대 발표는 없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식 전면전 선전포고도, 국민 총동원령도, 핵무기 사용 위협도 없었다. 그렇다고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에서 승리했다는 선언에 따른 긴장 완화 신호도 없었다.” 가디언지의 지적이다.
이날 열병식 행사장에 들어선 푸틴은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과 악수를 할 때나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 때 미소를 잠깐 지은 것 외엔 대체로 어두운 표정이었다. 벤 월리스 영국 국방장관은 “푸틴은 약간 절망한 기색이 보인다.”고 평가했다.
이는 푸틴이 점령을 공언한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지역에서 러시아군이 고전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러시아는 현재까지 남부 크림반도와 돈바스를 잇는 요충지인 마리우폴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최후의 항전 거점인 아조우스탈 제철소를 집중 폭격하고 있다. 미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는 이 같은 전황과 관련, “돈바스의 도네츠크주, 루한스크주를 점령하려는 러시아 공세 작전이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날 열병식에서 주목된 것은 12년 만에 등장이 예고됐던 핵전쟁 대비 공중 지휘통제기 ‘일류신(IL)-80 둠스데이’가 보이지 않은 것이다.
예년보다 오히려 축소돼 치러진 전승절 열병식. 푸틴의 다음 행보에 대한 실질적인 단서를 찾을 수 없는 장황하기만 한 연설내용. 전쟁 지역을 우크라이나 전체가 아닌 돈바스 지역만 언급한 사실. 무엇을 말하나.
‘서방의 대규모 무기 지원을 받은 우크라이나군과 고전 속 공세를 강화하는 러시아군 간 교착 상태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적지 않은 관측통들의 지적이다.
‘러시아는 러시아다. 다른 말이 아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적대적 입장은 변치 않는다.’ 이 같은 진단과 함께 미 CIA(중앙정보국)의 전 고위 당국자는 러시아는 돈바스지역에서 저강도 갈등을 계속 유도하는 전술로 회귀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맞는 전망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