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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본령’을 잊지 말라

2022-05-03 (화)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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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대선에서 윤석열 국민의 힘 후보가 당선되자 언론들은 이를 “쫓겨났던 보수세력의 귀환”이라고 평가했다. 박근혜 탄핵과 19대 대선 패배로 폐족이 될 위기까지 몰렸던 보수가 진보 정권 5년의 실정에 대한 유권자들의 실망감을 파고드는 전략으로 극적인 되치기에 성공하면서 다시 권력의 무대로 복귀한 것이다.

20대 대선에서는 보다 나은 나라를 위한 치열한 논쟁은 실종된 채 시종 혐오와 증오의 언어들만 난무했다. 유례없는 네거티브 대선은 사상 최소 차이 승부로 결론이 났다. 그리고 그런 대선이 남긴 후유증은 새로운 정부의 출범을 눈앞에 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통상적으로 치열했던 대선이 끝나고 일단 대통령이 선출되면 국민들은 새로운 정부에 대해 긍정적 기대감을 나타낸다. 18대 대선에서 근소한 차이로 문재인을 이겼던 박근혜에 대한 기대도 78%에 달했다. 그런데 오는 10일 출범하는 윤석열 정부가 국정수행을 잘 할 것이라 기대하는 국민 비율은 절반가량에 불과하다. “국민들의 기대치가 낮은 만큼 웬만큼만 한다면 잘한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란 해몽으로 자위하기에는 너무 좋지 못한 지표이다.


윤석열 정부는 보수를 내세우며 권력을 잡았다. 윤석열 정부가 진정 성공을 원한다면 딱 한 가지만 잊지 않으면 된다. ‘보수의 본령’에 충실 하는 것이다. 그동안 대한민국에서 보수를 자칭하며 권력과 기득권을 장악해온 세력들은 진정한 보수와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한국의 주류 보수는 친일에 뿌리가 닿아 있다.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친일세력이 보수라는 이름의 배로 갈아탄 것뿐이다. 보수라기보다는 극우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극우들 같은 민족의식이나 자주성을 찾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극우 치고도 함량미달이다.

보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정의들이 존재한다. 그런 만큼 단 한마디로 이를 규정하기는 힘들지만 역사를 통해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는 보수의 특징들을 요약한다면 ‘도덕성’과 ‘올바른 역사 인식’ 그리고 ‘약자에 대한 배려’를 꼽을 수 있다. 진정한 보수는 도덕의 붕괴를 개탄한다. 그리고 연민을 결여한 극우를 비판한다.

하지만 한국의 보수는 이런 가치들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 해방 이후 보수 정권들은 기득권 지키기와 어두운 과거를 가리는 일에만 몰두해 왔다. 진정한 보수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치 부역자 청산을 통해 해방된 프랑스의 역사 바로 세우기를 주도한 인물은 보수주의자 드골이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 출범을 앞두고 총리와 장관으로 지명된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어떻게 이런 사람들로 ‘공정’과 ‘상식’이라는 가치를 구현해 나가겠다는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병역과 재산, 그리고 역사관 등 본인들과 자녀를 둘러싸고 제기된 온갖 의혹들은 ‘공정’이라는 구호에 끌려 윤 당선인에게 표를 던진 많은 유권자들을 허탈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윤석열 당선인은 이명박 정부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검찰총장으로 국회청문회에 나온 자리에서 이명박 정부 시절을 “검사로서 가장 쿨했던 시절”로 꼽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측근들 가운데는 친이계가 다수이며 장관 후보자들 역시 그 시절의 가치관에 머물러 있는 인사들이 주류이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의 눈에 이들이 어떻게 비춰질지 궁금하다.

보수를 표방하며 권력을 잡았다는 것은 진보정부보다 한층 더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됐음을 의미한다는 걸 윤 당선인이 깨닫기 바란다. 역사의 굵직한 진전을 이끌어내고 교착상태를 타개한 것은 의외로 진보가 아닌 보수였다. 세계 최초로 복지국가를 만든 것은 철저한 보수주의자인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였다.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정상화시킨 것은 공화당의 닉슨이었다. 만약 민주당 대통령이 이것을 추진했다면 과연 가능했을지 의문이다. 보수의 본령을 제대로 깨닫고 있는 대통령이라면 자신 앞에 놓여 있는 역사적 기회들을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10일 대통령에 취임하는 윤석열 당선인에게 소통을 빌미로 한 ‘식사 정치’도 좋지만 그런 시간을 조금 줄여 좀 더 많은 책을 읽으라는 당부를 하고 싶다. 윤 당선인이 대선 캠페인 기간 중 사회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 대해 몰이해를 드러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통령은 이슈들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함께 인간을 이해하는 인문학적 소양이 요구되는 자리다. 대통령 당선을 자신의 소양에 대한 국민들의 인증이라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전 보수정권들은 보수를 너무 욕보였다. 그래서 “보수동에 위장 전입한 정권 아니냐”는 비판까지 받았다. 앞으로 5년 동안 ‘이명박근혜 시즌 2’를 보게 되는 일만은 없길 바란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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