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의 한 TV 기행 프로그램을 통해 부탄 사람들의 삶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히말라야 산맥 깊숙이 자리 잡은 부탄은 인구 70여만의 작은 나라. 도시들이 격변기를 맞고 있기는 하지만 국토의 대부분인 오지의 주민들은 여전히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그들만의 삶을 살고 있었다. 고산마을 한 유목민 가족의 이사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야크를 키우는 부부가 싱싱한 초지를 찾아 거처를 옮기는데, 이사행렬이 너무도 단출했다. 야크 몇 마리 앞세우고 어린자녀들 이끌고 봇짐 서너 개 들면 끝. 가족의 전 재산이 달랑 봇짐 몇 개였다.
자연 속에서, 최소한의 소유를 당연시하며, 느리게 흘러가는 삶을 그들은 살고 있었다. 척박한 조건이지만 그들은 평화로워 보였다. 국민총생산(GNP)이 아니라 국민총행복(GNH, Gross National Happiness)을 추구하는 나라에서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행복해 보였다.
그 무렵 한국에서는 넥슨을 창업한 젊은 기업가, 김정주씨 사망소식이 전해졌다. 김씨는 유전자 로토당첨자였다. 명석한 두뇌에 부유한 환경, 사회 최고위층으로 구성된 친가와 외가 - 금수저 중의 금수저인 김씨는 서울대 공대 재학시절부터 사업을 시작하더니 승승장구, 지난해 포브스 기준 한국 2위 부자에 올랐다. 하지만 130여억 달러의 재산과 놀라운 성취에도 불구, 그는 행복하지 못했다. 오랜 세월 우울증에 시달리다 54세에 스스로 생을 끝냈다.
햇빛 한줄기로도 누릴 수 있는가하면 천만금을 가져도 잡을 수 없는 것, 행복은 신기루 같다.
유엔이 지난 18일 ‘2022 세계 행복보고서’를 발표했다. 부탄의 국민총행복 지수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유엔은 지난 2012년부터 세계 각국의 행복 정도를 측정해왔다. 주관적 느낌인 행복감을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위해 유엔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는 각국의 국내총생산(GDP), 건강 기대수명, 사회적 지지, 인생에서 선택의 자유, 부정부패, 관대함 등 6개 항목을 토대로 행복지수를 산출했다.
2019년부터 2021년 3년 동안의 갤럽조사를 토대로 작성한 금년 보고서에서 146개국 중 1위는 핀란드였다. 핀란드는 연속 5년 째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다. 이어 덴마크(2위), 아이슬랜드(3위), 스웨덴(7위), 노르웨이(8위) 등 북유럽 국가들이 언제나 그랬듯이 행복순위 상위권을 휩쓸었다. 미국은 16위, 한국은 59위. 한때 행복지수 1위 국가로 찬사를 받았던 부탄은 GDP, 기대수명 등이 적용되면서 최하위권으로 밀려났다.
핀란드나 덴마크 등 북유럽의 행복지수는 왜 그렇게 높은 걸까. 그들은 정말 그렇게 행복한 걸까. 미국에 사는 핀란드 작가가 이와 관련해 지난해 쓴 글을 읽었다. 그는 북유럽 국가들이 복지정책이 잘 돼 있어 살기 편안하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행복순위 1위? 말도 안 돼”라고 했다. 행복지수가 높은 이유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들 나라의 복지정책은 거의 완벽하다. 대학까지의 교육, 건강보험, 출산 및 육아를 위한 유급휴가, 여름 겨울 유급휴가 등을 정부가 넉넉하게 제공해주니 ‘요람에서 무덤까지’ 큰 걱정 없이 살 수가 있다. 하지만 부작용도 없지는 않은 것 같다. 가만있어도 먹고 살 수 있는 환경이 무기력함으로 연결되면서 자살률 또한 높은 것이 북유럽이다.
그렇기는 해도 이들 나라 국민들은 우선 피 말리는 경쟁 없이 살 수 있으니 부럽다. 1등 하려고 기를 쓰지 않아도 되고, 한번 삐끗하면 ‘벼랑 끝’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불안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 축복이다. 단, 세금을 엄청 많이 내지만 모두들 그러려니 한다. 정부가 평생의 삶을 보장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대단한 부자도 없고, 대단히 가난할 수도 없는 조건에서 그들은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루며 가족 친지들과 소소한 행복을 나누며 사는 것 같다.
한편 북유럽인들이 행복한 진짜 비결은 따로 있다고 앞의 핀란드 작가는 말한다. 대단한 것 바라지 않고 현재에 만족하는 자세가 몸에 배어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루터교 전통으로 검소함이 몸에 배어서 가진 것에 감사하며 자족하는 태도이다.
이들이 행복의 원천으로 내세우는 것들을 보면 사실 소소하다. 예를 들면 덴마크의 ‘후거(hygge)‘. 어둑어둑한 저녁에 촛불을 켜고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따끈한 차를 마시는 평온함. 폭신한 담요로 영혼을 감싸는 듯한 아늑한 느낌을 말한다.
덴마크에 후거가 있다면 핀란드에는 ‘칼사리캔닛(kalsarik?nnit)’이 있다. 직역하면 ‘팬티바람 만취’. 집에서 혼자 팬티바람에 술을 마시며 잔뜩 취하는 것이다. 그런 편안함에서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웨덴에는 ‘라검(lagom)’이 있다. 북유럽 국민들의 행복 비결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다. 라검은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고, 딱 적당한 양이라는 뜻. 뭔가 대단한 것, 많은 것을 추구하지 않고 지금 가진 것이면 족하다는 소박한 삶의 자세를 말한다.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족과 감사이다. 과하게 바라지 않고, 좋은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며, 재정적으로 안정될 만큼의 소득이 있으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더 이상을 바라는 순간 행복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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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