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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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식의 독서일지

2022-03-13 (일) 박명희 / 전 한국학교 교사,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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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으로 치우칠 편(偏)이 들어있는 낱말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편모 가정에서 자란 나는 편식이 심했고, 가끔씩 편두통에 시달리며 좋아하는 일이나 사람에게만 마음을 쏟아 편애를 한다. 자고로 큰 인물이나 사기꾼이 되려면 알 수 없는 중용의 태도로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어야 하는데 좋고 싫고가 온 몸으로 드러나는 나는 호불호가 확실한 찐찐한 소인배이다.

밤에 먹는 사과는 안좋다고 하지만 그래도 안먹는 것 보단 낫지? 잘먹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며 아무것도 안읽는 것 보단 낫다고 생각하며 뭐든지 눈에 보이는 대로 가리지 않고 읽었다. 읽기의 즐거움을 알면서 부터는 주변에 인쇄물이 있으면 읽어야 맘이 편해지고 어디라도 다녀오면 공부는 뒷전이고 밀린 숙제하듯 며칠치 묵은 신문을 읽는 내가 한심했다. 한 번 이라도 읽은 것은 대부분 기억하는 나를 천재와 바보는 한끗 차이라며 걱정했지만 천재는 깨뿔이고 나중에 알고보니 난 활자중독증에 빠진 편집증 증세였다.

처음엔 만화책을 엄청 좋아해서 중학교 입학시험 보는날도 단골 만화가게에서 그날의 신간 만화를 읽고 가느라 교문이 닫힐때 헐레벌떡 들어가며 학부모들을 모세의 기적처럼 쫘 갈라지는 기적을 만들었다. 수세식 쪼그리 화장실에서 다리에 쥐가 나면서도 선데이 서울의 찢어진 야한 사진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궁금함과 짜릿함은 잊을 수 없다. 학교에서는 선생님 몰래 돌려가며 읽었던 허무맹랑한 핑크빛 로맨스가 가득한 불량소설 주인공과 사랑에 빠져서 보통의 남자애들이 시시했다.
대학 때까지 우리집은 신촌 기차역 근처였고 외가는 이화여대 앞이었다. 하교길에는 할머니와 남동생만 있는 집 보다는 대학을 다니던 사촌 언니와 오빠가 있던 외가집 응접실 소파에 파묻혀 책장에 있는 책을 모조리 읽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문학사상과 왜 읽는지 알 수 없던 어려운 사상계를 읽으며 신춘문예 당선작가인 최인호 박완서의 연재물을 매달 기다리며 나도 언젠가는 그들처럼 작가가 될거라 확신하고 내 또래 친구들을 괜시리 내려보며 니네들이 이 맛을 알리 없다며 헛바람이 들었던 휴유증으로 지금도 신춘문예 응모전 기사를 보면 괜시리 두근거린다. 김찬삼 세계여행기를 읽은 뒤 부터는 여행을 계획하고 고고학자가 되어 작은 비행기로 마츄비추 같은 유적지를 발견하려고 했으나 요즘은 최신 드론을 이용한다. 현실을 깨닫고 정신 차린 나는 교사란 안정된 직업을 발판으로 박물관과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 여행지에 빠져서 전국의 박물관과 산과 들과 강과 바다에 빠져 한국의 문화와 자연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를 누구에게라도 한국어로 얼마든지 알려줄 수 있다.

나는 여행수필이 좋다. 몇번이고 거듭 읽은 그 곳에 찾아가 머물때의 기쁨으로 행복하다.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곳도 있지만 세상은 넓고 가야 할 곳은 많으니 되도록 한번 간 곳은 그리움으로 남겨야만 다시 만난 첫사랑의 벗겨진 머리를 보는 늙은 슬픔에 서로 실망하지 않을것이다.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가고 책만 읽고 또 읽으니 가야 할 여행지가 눈 앞으로 줄 서서 아롱거린다. 지도를 좋아하는 나는 그림 대신 걸어놓은 지구본, 세계지도, 한국, 미국, 메릴랜드, 몽고메리카운니에서 가본곳을 형광펜으로 칠 할때면 기분좋아 입은 귀 밑으로 올라간다.

카사블랑카 영화 속의 모로코를 그리며, 프로방스에 가서 와인을 마시고 다음날 숙취에 시달리고 싶고, 요즘 좋아하는 태원준 여행작가의 터키에서는 일출과 함께 열기구를 타고 하늘로 오르고 밤에는 끈적한 댄서의 배꼽춤에 빠져들 날들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무엇이든 아는만큼 사랑하게 되는데 아는게 부족해선지 내가 사는 미국은 참 좋기는 한데 깊고 진한 맛은 덜하니 알고 싶은 만큼 앞으로도 책읽기는 쭉 이어질것이다

<박명희 / 전 한국학교 교사,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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