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파리를 따라갔더니 화장실에 이르렀고, 어떤 사람은 꿀벌을 따라갔더니 꽃밭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무엇을 따라가느냐, 누구를 따르느냐가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과 함께 하는가에 따라 우리 인생이 달라집니다. 함께 하다가 보면 닮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지런한 사람과 함께 하면 우리도 부지런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과 함께 하면 우리도 게을러질 수 있습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람과 함께 하면 우리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사람과 함께 하면 우리도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함께 하면 우리도 지혜롭게 될 수 있지만,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하면 어리석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함께 하지만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로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따라 가고 있습니까? 누구와 함께 하고 있습니까? 선택은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 성령님께서 이 선택을 하라고 강권하십니다. 그것을 거부하고 선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늘 주님을 따라가면 비록 그 길이 좁고 힘들어도 놀라운 축복의 결말을 보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주님의 고상한 인격과 성품이 우리 삶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주위에 향기가 퍼지게 되어 사람들이 모여 들게 됩니다. 어두운 이 세상에 빛을 비추게 되면 아무리 작은 빛이라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따라가느냐, 어떻게 함께 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개 실패하는 사람들의 몸에는 못된 벌레 한 마리가 살고 있다. 그 벌레의 이름은 ‘대충’이다.” 당연하지요. 무슨 일이든지 최선을 다하지 않고 대충 대충하는 사람들이 실패할 수 밖에 없지요. 주님을 따라갈 때도 그저 ‘대충’ 따라간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저 적당하게 내 마음에 내키는 대로 따라가니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잡히겠습니까? 사람들 눈치나 보며 신앙생활을 한다면 주님이 좋아 하시겠습니까? 주님과 동행하는 것도 적당히, 대충 한다면 전혀 주님의 영향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닮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지도자도 자신을 따르는 사람이 온전히 헌신이 되어 있지 않고, 적당히 대충 따라간다고 한다면 좋아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어느 남편이나 아내가 함께 살아가면서 그저 대충 함께 한다면, 서로에게 마음을 다 주지 않는다면 그 부부생활이 정상적이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대충 따르고, 대충 함께 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3월을 맞았습니다. 비록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하여 온 세상이 염려하고, 그 나라 국민들이 어려움을 당하며 세계 경제가 흔들리는 것을 보지만, 여전히 봄은 찾아오고 만물이 소생할 것입니다.
약속하신 대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소망 가운데 최선을 다하기 원합니다. 우리 안에 ‘대충’이라는 벌레는 사라지고, 확실히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따르며, 동행하기를 바랍니다. 분명히 주님께서 모든 것을 선하게 인도하시며, 결국 가장 아름다운 복을 허락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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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태일 목사(가든교회,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