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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는 축제다, 워싱턴 투표소 단상

2022-03-06 (일) 송승호 센터빌,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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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6일, 27일 주말을 애난데일 인근의 워싱턴코리안커뮤니티센터에 설치된 투표소에서 투표함석 투표 사무원으로 봉사했다. 아침 7시 투표소에 도착해 커피 한 잔으로 몽롱한 정신과 긴장된 근육을 깨운다.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재외선거가 시작된 지 4일째, 주말이라 많은 선거인이 몰려올 수 있다고 예상했다.

헌법에 따라 공정하게 투표 사무원의 역할을 다하겠다고 엄중히 선서하고, 특수 봉인지로 봉인된 노트북과 투표용지 발급기를 참관인과 선거 관리 위원장이 봉인을 해제한다. 그리고 투표용지를 넣는 투표함을 특수 봉인지로 봉인하고, 컴퓨터 시간으로 8시 정각에 투표를 시작한다. 뒤쪽에서 웅성거린다.

벌써 몇 명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프린트된 투표용지를 받아 기표하고, 기표소에서 나와 투표용지를 넣은 봉투를 투표함에 넣는 선거인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두 손 모아 공손하게, 한 손에 또 한 손을 받혀서 부르르 살짝 떨리는 손이 좁은 투표함 주위를 헤매다 겨우 입구에 닿는다.


“끝난 거예요?” 하고 허무한 마음을 나에게 보상 받으려 한다. “네, 끝났습니다.”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한 시간이 너무 짧아 쭈뼛쭈뼛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돌아선다. 본인 확인을 하고 주소지 선관위로 발송되는 주소 라벨 봉투와 함께 투표용지를 발급받고, 기표소로 들어가 지지하는 후보에게 기표하고 나와 투표함에 넣기까지 1분30초에서 2분이면 모든 것이 끝난다. 대한민국의 기술력이 놀랍다. 자동차로 짧게는 10여 분에서 멀리는 8시간 걸려서 온 분들에게는 아쉬울 수밖에 없다.
생각보다 긴 투표용지 14명의 후보자를 보고 당황하고, 처음 들어본 듯한 이름들을 보니 씁쓸한 표정이다. 하지만 곧 진지해진다.

도장이 반쯤 찍혀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도움을 구한다. 반쯤 접은 투표지가 인주를 번지게 하여 귀중한 내 한 표가 무효표가 될까 두려워 ‘팔랑팔랑' '팔랑팔랑' 인주가 마를 때까지 흔들어보고 '호호' 불어 보기도 한다.

재외선거인과 국외 부재자를 구분하지 못하고 유권자 등록을 하지 못해 발길을 돌린 아주머니, 대한민국 여권을 가지고 있는데 왜 투표를 할 수 없느냐고 호통을 치는 할아버지, 도움을 주려는 사무원에게 “I don't need your help!”를 외치며 혼자서 씩씩하게 기표소로 걸어 들어가는 할머니, 미국 시민권 취득을 위해 인터뷰까지 마쳤지만 선서를 하지 않아 아직까지는 투표를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아가씨 등 자신의 권리 행사를 위한 선거인들의 이런 행동들이 아름답게 보인다.

“학생들은 기표소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라는 규칙은 아이들에겐 좋은 교육현장이라고 생각하고 자녀들을 데리고 투표소에 온 부모님들을 당황시킨다.

'투표소 안에서 사진 촬영을 하시면 안 됩니다.’라는 안내를 받고서도 “사진 좀 찍어 주실래요?” 하며 머리가 허연 노부부가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는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생애 첫 투표라며 인증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어보는 청년들의 물음에 안 된다고 대답하는 나의 입장이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나는 ‘선거는 축제다’라고 생각한다. 선거는 진지하게 임해야 하지만, 법을 위반하지 않고 질서를 해치지 않는다면 융통성 있게 허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월 23일부터 시작된 6일간의 재외선거가 끝났다. 투표 기간 중 이틀 동안 투표함 앞에 앉아서 기표소와 투표함만 바라보며 9시간씩을 버티기가 몸살이 났지만, 함께 만들어 가는 세상을 본 것 같아 즐거웠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다. 스무 살 청년부터 아흔이 넘은 어르신들까지 각자가 지지하는 후보자가 당선되기를 마음으로 투표를 했을 거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내가 생각하고 지지하는 정책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이 투표를 하는 이유이고 민주주의를 실현한다고 생각한다.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즐기면서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 선거 문화가 자리 잡기를 기대해본다.

<송승호 센터빌,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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