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는 1919년 3월 5일 이화여고 1학년 재학 시에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했다. 조선총독부는 유관순을 체포하여 경성 복심법원이 징역 3년을 선고했다. 당시 일제의 검사가 독립운동의 배후자를 색출하기 위해 유관순이 시위 가담자를 실토하면 무죄로 선처하겠다는 교활한 제안을 했지만, 유관순은 죽기 전까지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배후를 발설하지 않았다.
생전에 마지막으로 부모님과 면회를 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18세의 유관순은 미소를 지으며 하직인사를 드렸다.
“아버님, 어머님. 저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죽습니다. 기뻐하세요. 저는 아름다운 꽃가마를 타고 하늘나라로 갑니다.”
일본제국 치하의 조선사회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암흑의 사회였다. 일제는 무력을 앞세워 일제를 불평하는 사람들을 구금하고 학살했다.
이러한 공포 속에서 조선의 애국적인 문인들의 입지는 너무 힘들었다. 친일파 이광수처럼 친일적인 글을 쓰고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 총독부로부터 경제적 지원과 조선과 일본에 문명을 날리고 출세를 할 수 있었지만, 독립정신에 불탔던 문인들은 달콤한 유혹을 거절했다. 이들 문인들 중에서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을 수행한 사람이 있었다. 윤동주였다.
윤동주는 연희 전문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도시사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수학 중 불행한 운명을 맞이한다. 일제 순사로부터 항일운동을 했다는 의심을 받고 불량선인으로 지목되고, 1943년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교토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윤동주는 태생적으로 타고난 시인이었다. 개미 한 마리도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못하는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명경처럼 청명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비 내리는 어느 가을 밤, 동주는 일본식 다다미방에 홀로 앉아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줄 알고서, 조선총독부의 겁박에도 담대히 서정적인 민족시 ‘쉽게 쓰여 진 시’를 썼고, 이 시에는 애국정신이 강렬하게 담겨 있었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 대학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간다 / 생각해보면 어릴 때 동무를 하나 둘 모두를 죄다 잃어버리고 / 나는 무을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寢殿)하는 것일까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쓰여 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후의 악수’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29세의 꽃다운 나이에 마루타 인체실험으로 죽었다고 하는 의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진실한 삶의 울림은 세월이 갈수록 더 커지는 법이다. 윤동주는 애국지사로서 서정적인 시인으로서 한민족의 추앙을 받고 있다.
8.15 해방 후 3.1 독립정신은 마산의 3.15 부정선거에 대한 민중의 의거, 4.19 의거, 5.18 광주 의거 등을 거치며 지속 발전해 왔다. 3.1 독립정신을 기초로 민족의 정기는 한민족의 찬란한 미래를 밝히는 횃불이 되어 영원히 타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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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김 / 그린벨트,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