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더불어 사는 세상

2022-02-21 (월) 최수잔 / 워싱턴 두란노문학회
크게 작게
어려서 우리 집엔 가훈이 있었다. 대청마루 기둥에 붓글씨로 길게 걸어놓은 가훈을 온 가족이 모일 때면 아버지는 우리 6남매에게 읽으라고 하셨다. “의롭게, 명랑하게, 부지런하게, 정직하게”를 포함해 “서로 돕고 진취적이며 경제적으로 살자” 로 끝나는 7가지 가훈을 한글을 막 깨우친 막내동생까지 뜻도 모르면서 줄줄이 외우고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마음에 은근히 스며든 가훈 덕분에 우리 형제는 떳떳하고 기쁘게 살 수 있지 않았나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가사도우미 등 대식구가 두레상에 앉아 한솥밥을 먹고 가족의 사랑을 느끼며 자신의 자리에서 만족하고 감사하며 소박한 정을 나누던 시절이었다. 될 수 있으면 아침식사는 온 가족이 함께 하자고 주장했던 엄마의 정성으로 우리는 때로는 불편했지만 행복했었다.

할머니는 늦게 돌아오는 식구를 위해 아랫목 이불속에 밥을 덮어 묻어 놓으셨고 엄마는 국이 졸아질 때까지 데우고 또 데우며 아버지를 기다리셨다.
요즘은 등교시간이 다르고 각자 귀가하는 시간도 달라 식탁은 커녕 서로가 언제 귀가했는지도 모르고 잠자리에 들기 바빠서 며칠간 얼굴보기도 힘들다고 한다. 혹시 같이 집에 있어도 컴퓨터나 휴대전화에 정신이 팔려 자기 방에서 건성으로 인사하는 시대가 되었다. 한 집에 살지만 잠만 자는 동거인… 우리 모두가 그렇게 혼자되어가는 세상에 닿다니 웬지 서글픔이 인다.


며칠전 한국신문에서 아파트에서 쓸쓸히 혼자 죽어간 노인의 기사를 보았다. 시신이 부패될 쯤에 발견되었다니 할아버지가 겪었을 외로움에 가슴이 아파왔다. 아들도 근처에 살았다던데. 근래에는 코로나로 인해 더욱 부모를 볼 수 없고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이 걱정할까 해서 이야기를 안한다고 한다. 죽고 싶은 기분이 들거나 무척 괴로워도 누구에게 말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지구가 한 마을처럼 가깝게 연결된 세상이라지만 정작 바로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지낸다.

그런 면에서 우리에겐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기러기의 지혜가 아쉽다. 기러기가 멀리 여행할 수 있는 건 선두에서 나는 기러기들이 바람물결을 일으켜서 뒤따르는 기러기들을 쉽게 날게하고 뒤에서 날고 있는 기러기들은 앞의 기러기들이 힘들까봐 까욱까욱 소리를 내며 서로 격려하고 응원하며 자리를 바꾸고 고통을 나누는 데에 있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헬렌 켈러를 위대하게 교육시켜 전 세계를 놀라게했던 훌룽한 선생님이 앤 설리반인 건 누구나 잘 안다. 그러나 앤 자신의 어린 시절도 비참했던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엄마는 죽었고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여서 동생과 함께 보스턴의 보호소에 보내졌다. 얼마후 동생마저 죽게되자 그 충격으로 실명했고 정신이상으로 자살도 시도했고 괴성도 질러대는 등 회복불능판정을 받고 정신병동 지하 독방으로 수감되었다. 모두가 포기한 앤의 삶을 나이많은 간호사 로라가 정신치료가 아닌 친구가 되어 책도 읽어주고 기도하면서 모든 사랑을 기울여 돌보았던 결과 조금씩 반응을 보이고 정신이 돌아와 2년만에 정상인으로 판정되어 시각 장애인 학교에 입학했고 밝은 웃음도 찾았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헬렌을 앤은 사랑과 희망과 용기를 주면서 인내로써 기적을 이루어냈다. 로라, 앤, 헬렌이 체인처럼 더불어 살았던 것이다.
인생의 본질은 서로 많이 사랑하고 나누고 즐기며 삶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열정과 긴장을 늦추지 말고 살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고 용기를 주면서 상부상조하며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최수잔 / 워싱턴 두란노문학회>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