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치아타령을 몇 년째 하고 있는 중이다. 기계도 70년 넘게 사용하면 몇 번을 갈아 끼우다 못해 폐기처분 할 터인데, 우리네 치아도 그 과정과 비슷하게 닮아 있는가 보다.
중년을 넘기고부터 삐거덕거리던 치아을 치료하기 위해 어느 날 큰 대학병원 치과를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X-ray의 파노라마 사진을 들여다보던 노교수의 진찰결과는 나를 경악하게 했다. 부실한 치아를 가지고 평생 치과치료를 받느니 차라리 틀니를 끼워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마치 앞날을 점치는 점술가처럼 처방을 내리는 것이었다. 아직 내 나이가 얼마인데 하며 모욕적인(?) 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박차고 나온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 후로도 그분의 말처럼 작은 입을 한껏 벌려야 하는 곤혹스런 치과치료가 잊을만하면 수시로 시작되곤 하였다. 한창 집안 일로 바쁠 때면 띄엄띄엄 있는 먼 거리의 치과를 찾아가야 하는 번거로움 대신, 다행히 집 가까이 새로 개업한 치과가 있어 전화로 연락만 하면 자신의 사무실로 오게 하여 치아을 뽑고, 덮어씌우고 하는 일련의 과정을 편안하게 이웃집 드나들듯이 계속했었다. 아직도 그분이 만들어 끼워 준 반짝이는 금치아이 금쪽 같이 내 어금니 한 쪽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다.
뒤돌아보면 친정 할머니가 살아 계시던 그 시절에는 상차림으로 할머니와 아버지께는 따로 겸상을 해 드리고, 다른 식구들은 두레상에서 둘러 앉아 식사를 하곤 하였다. 한참 음식을 씹으시던 할머니가 덜컥거리는 틀니가 못내 불편하셨던지 “이젠 도저히 아파서 더는 못 참겠다” 하시면서 갑자기 마당으로 하얀 틀니를 획 던지시는 것이었다.
순간 마당 한 가운데 내동댕이쳐진 틀니를 보며 식구들 모두 놀라 할머니를 쳐다보았던 기억과 함께, 틀니하면 문득 대학병원 노교수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치아도 유전이었는지 할머니도 그리고 어머니도 노년에는 차츰 틀니를 끼워 사용하셨다. 틀니조차 없었던 시절에는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살았을 터인데 그 불편을 생각하면 치아의 중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다.
드디어 임플란트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막 미국에서 공부하고 들어온 젊은 치과의사를 소개 받았다. 그 당시 시험대에 오른 줄도 모르고 겁 없이 임플란트 시술로 치아 3개를 심었다. 한동안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지만 지금껏 20년 가까이 사용하고 있으니 임플란트 예찬론을 들먹이지 않을 수 없다. 잊고 살았던 치아가 노년에 접어들고부터 자주 문제를 일으킨다.
망가지는 치아를 임플란트로 대체하기에는 젊었을 때와는 달리 또 다른 고도의 섬세한 기술을 요하기에 나름대로 틀니와 임플란트 시술 중 어느 쪽을 택할까 고민 중이다.
평소 집안 청소는 말끔히 하면서도 정작 눈에 보이지 않는 치아 청결을 소홀히 하였던 결과를 이제야 된통 맛보는구나 하면서 중년이 된 자녀들에게 자주 경고를 한다. 치아에 빨간 신호등이 켜지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지 말고 즉시 치과로 달려가, 오복 중의 하나인 치아만큼은 내 집 지키듯이 지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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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순 / 우드스톡,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