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눈(雪)에 대한 예찬

2022-01-24 (월) 정은실/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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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거리는 소리에 새벽잠을 설치고 내다본 밖의 풍경은 가히 장관이다. 바람을 타고 내리는 백색의 군무에 한참을 넋을 잃고 홀린 듯 창가에 서있다. 헐벗은 겨울나무를 위로라도 하듯 사뿐히 내려앉은 눈부신 자태에 나목은 휘청거리는 긴 팔을 벌려 반갑게 맞는다. 마지막 한 잎까지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목과 순백의 거룩한 만남은 오늘 밤 이렇게 시작되었다.

오랜 기다림 끝의 해후에 온몸을 흠뻑 적신 나목은 동이 트면 푸르디푸른 웃음을 풀풀 날릴 것이다. 세상은 작은 병원체 하나로 들썩이고 사람들은 모두 겁을 먹어 움츠리지만, 순백의 겨울 전령사는 보란 듯이 춤추며 내려오고 있다. 어둡던 주위가 갑자기 환해졌다. 멀리서 들리는 개 울음소리조차 정겨울 정도로 잠시 시간을 정지시키고 정지된 시간 안에 머무르고 싶다.

서서히 여명이 터오면서 순백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한다. 제 몸보다 무거운 순백의 무게를 온 힘을 다해 기쁨으로 안고 있는 여린 나뭇가지에서 숭고한 아름다움을 본다. 아직 사위는 고요한데 뒤뜰은 부산스럽다. 순백은 이미 다 져버린 메마른 꽃나무에 하얀 꽃송이를 만들어주고 어디서 나왔는지 다람쥐 한 마리는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바람을 따라 방향도 없이 유랑하는 무책임한 하늘의 유랑아는 닿는 곳마다 지분대지만 머무는 순간은 지극히 찰나적이다. 그러나 그 찰나를 즐기기 위해 때론 잠을 설치며 기다리는 수많은 시간이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유한하거늘 마치 영원할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왔다. 사랑하고만 살아도 짧은 인생인데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분노를 느끼고 미움을 가졌다. 큰마음으로 멀리 보지 못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내 안에서 옹졸함만 키웠다. 대지를 덮고 있는 자연의 아들, 은빛으로 반짝이는 무결의 보석을 보면 스스로가 부끄러워진다.

드디어 붉은 해가 솟기 시작하고 간간이 들리는 차 경적이 고요를 깨며 아침을 연다. 이제 거룩한 백색의 군무는 멈췄다. 그러나 군무의 흔적은 세상을 온통 순백으로 바꿔놓았고 이제 사람들은 눈을 뜨면 경이의 환호성을 울릴 것이다. 밤새 기적처럼 잠깐 다녀간 하얀 손님에 대해 시인은 시를 짓고 음악가는 노래하고 화가는 화폭에 담을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면 물로 사라질 찰나적인 환희를 맛보기 위해 하루를 다 소진하고 마침내는 인생을 다 소진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러하듯이.

<정은실/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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