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백지 한 장을 또 받았다. 해마다 감사하며 받는 선물이지만 2022년 밝아오는 태양, 그 여명에 반사된 푸르도록 새하얀 종이에는 파란 잉크 찍어 희망을 그려 놓으면 파란 날개달고 솟아 오를 것같은 기분이다. 무언가 해낼 것 같고 팬데믹에 불안하고 지친 몸과 마음도 인내의 심호흡을 살짝 더 불어 넣으면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라질 것같은 희망도 솟는다.
그런데 연초부터 이 곳 동부에서 혹한과 폭설로 인해 많은 피해자가 나오고 95번 하이웨이에서는 차가 막혀 20시간넘게 꼼짝없이 도로선상에 갇히는 사건도 생기고 공항에서는 천여 대의 비행기가 취소되어 여행자의 발이 묶이고 뉴욕시에선 아파트에 불이 나서 어린애를 포함 17명의 사망자가 나왔다는 아픈 소식만 들린다. 삶은 상실과 고통과 예측불허의 연속이다.
현실은 마냥 비현실일 것같고 초현실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인간으로서 거역할 수 없는 현실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살아낼 용기와 끈기이다. 끈기룰 갖고 살다보면 삶은 변한다. 존 버넌의 ‘천로역정’에서 ‘낙심의 늪은 기쁨의 땅에 길을 내어준다’ 라는 말처럼. 진정한 희망은 고난 속에서 빛을 발한다.
사실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가 축복이고 은혜이다. 아침에 눈을 뜰 수 있음에 고맙고 풍성한 식탁은 아니어도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있음에 감사하고 함께 즐길 수있는 가족과 친구가 있어서 행복하다. 사흘 간격으로 연속된 두번의 폭설이 지나가고 오늘의 하늘은 푸르고 푸른데 온 천지를 하얗게 덮은 대지 위에 우뚝서서 하얀 눈꽃을 피우고 있는 나무들의 정경이 정말 그림같다.
한동안 추워보이던 나목이 하얀 옷을 입고 있으니 마음도 따스해 온다. 집 뒷마당 하얀 숲길 속에서는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 맞으며 눈썹까지 희도록 친구들과 걸었던 남산길이 보이고, 손에 밴 군밤 내음 풍기며 들렀던 다방에서 피어오르던 커피향이 코 끝으로 전해오고, 음악들으며 재잘대던 친구들이 그리움을 타고 뿌옇게 나타나고 있다. 그들도 모두 각자의 삶에서 열심히 살고 있겠지.
삶이란 무엇인가. 새롭고 생생하게 피어나는 꽃처럼 매 순간 우리의 영혼을 맑고 밝고 즐겁게 가꾸면서 소중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늙어가고 시간이 지나면 죽는 게 인생이다. 우리의 두려움은 늙음이나 죽음에서만 오는게 아니라 생생함이 없는 녹슨 삶에서 온다
4년전 희귀암으로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편지가 전세계인의 마음을 애절하게 했던 호주의 여성 홀리 부처(Holly Butcher)가 생각난다. 그녀는 담담하지만 절절한 마음으로 말했다. “인생은 부서지기 쉽지만 소중하고, 예측할 수 없지만 매일은 선물일 뿐 주어진 권리가 아닙니다. 나는 이제 27살, 가고 싶지 않아요, 삶을 사랑하고 행복합니다.
내가 바라는 건 한 번 더 가족과 함께 생일이나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보는 것이예요, 제발 한 번만 더… 삶의 작은 것, 무의미한 스트레스에 걱정을 내려놓고 자신의 시간을 값지고 의미있게 보내세요. 짜증나는 일이 있으면 밖에 나가서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푸른 하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숨을 쉰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느끼며 생각하세요. 다른사람이 당신과 시간을 보내주는 것에 감사하고 자연을 만끽하고 순간 순간을 즐기세요” 등의 인생충고를 남기고 죽음을 당당히 받아들였다.
새해에는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고 만나는 사람마다 따뜻한 미소를 건내며 살 수 있으면 좋겠다. 더불어 사는 삶이지만 그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추구해 가자.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오아시스를 찾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다.
눈보라치는 혹독함에도 꽃망울을 터뜨리는 매화처럼, 꽁꽁 언 겨울 밭고랑에서 뿌리를 내리는 보리처럼, 폭풍우가 몰아치고 배가 흔들려도 태양은 다시 뜨고 내일은 반드시 찾아온다. 새해에는 모든 걸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힘을 합쳐 모두가 즐겁고 행복하길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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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잔 / 워싱턴 두란노문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