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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들고 달려온 격동의 40년 한인섭 전 VOA 국장의 취재파일 ⑦

2022-01-12 (수) 한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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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관계에 시련 안겨준 ‘광주사태’

마이크 들고 달려온 격동의 40년  한인섭 전 VOA 국장의 취재파일 ⑦

1980년 5월 광주에서 민주화 시위가 열리고 있다.

한인섭 미국의 소리(VOA: Voice of America) 전 한국어방송 국장의 취재 파일을 연재한다. 서울 생인 한 전 국장(85)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마치고 1965년 VOA에 입사했다. 그 후 40년 동안 한반도를 둘러싼 요동치는 현대사의 참모습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마이크를 들고 뛰어다녔다.
‘마이크 들고 달려온 격동의 40년’이란 제목의 이 연재물에는 유신체제에서 탄압 받은 실상, 한미관계와 광주사태, 6월 민주항쟁, 북한 탐방, 유엔 가입과 남북한 외교관들, 백남순 북 외무상 회견,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와의 면담 등 흥미로운 현대사와 비화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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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도 짧았던 ‘서울의 봄’
1979년 10월 박정희 장군이 그의 심복 부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피살되자 국민들은 드디어 유신체제가 끝나고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가 꽃 피우리라는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1980년 2월29일에는 김대중씨가 오랜 연금생활에서 풀려나 복권됐고 차기 대통령은 김대중씨와 신민당 총재 김영삼씨, 공화당 총재 김종필씨의 3김(金)중에서 나오리라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1979년 12.12 항명사건으로 사실상 군권(軍權)을 장악한 전두환 소장과 신 군부 세력은 암암리에 권력계승의 수순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리라고 기대하고 있던 국민과 학생들은 신 군부와 대결의 길로 나아갔다.
1980년 신학기가 되자 대학생들은 그 당시 나돌고 있던 정부의 이원집정제(二元執政制) 구상을 유신체제의 연장 음모로 판단하고 대규모 시위를 벌이게 된다. 5월15일 서울역 광장에는 10만여 명의 학생들이 운집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데모를 벌였으나 학생들의 자진해산으로 큰 충돌은 없었다.

신 군부는 사회불안을 진정시킨다는 명분아래 5월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 실시하고 국회와 대학교들을 폐쇄했으며 정치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5월 18일 광주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자 신 군부가 출동시킨 공수특전단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5월27일까지 계속된 광주항쟁으로 근 200명의 인명이 희생되었다. 서울의 봄은 이렇게 광주에서 비극으로 끝났다.

그 후 신 군부 세력은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광주사태의 주동자로 김대중씨를 지목하고 내란주동 혐의로 기소했다. 대법원은 1981년 김대중씨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압력이 거세지자 전두환 대통령은 김씨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고 뒤이어 20년형으로 줄였다. 김대중씨는 1982년에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

# 미국은 광주 유혈진압을 묵인했나
5.18 광주사태에서 미국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 “방대한 정보수집 능력을 가진 미국이 특전단 부대의 이동을 사전에 모를 리가 없었다”든지 “한국의 신 군부가 미국정부와 미군의 묵인 하에 무자비하게 진압을 감행했다”는 논리와 주장은 일부 한국 국민과 재야세력에서 끈질기게 제기되어 한미 관계를 악화시키고 반미감정을 부추겼다.
그러나 미국 측은 한국국민이 미국과 미군의 정보수집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미국대사관이 알고 있는 것으로 믿는 경향이 있다고 반박했다.

이러한 혼선을 가려내고 또 광주사태의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한국 국회는 전두환 대통령이 물러나고 제6공화국이 들어선 후 1988년 8월에 ‘광주 민주화 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광주특위)를 구성했다. 11월23일 한국 외무부는 윌리엄 글라이스틴 전 대사와 존 위컴 대장에게 광주특위에 출두해 증언하도록 요청했다.
같은 해 12월 미 국무성은 두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 적절치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 대신 광주특위의 서면질문에 회답하는데 동의했다. 1989년 3월 주미 한국 대사관은 광주특위가 준비한 48개항의 질문서를 미 국무성에 전달했다.

<한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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