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요일자 교육섹션에 김성식의 ‘미국 들여다보기’ 시리즈를 게재한다. 이 시리즈는 미국에 이민 와 살면서 알게 된 미국의 시시콜콜한 것들로 그래도 알고 있으면 미국 생활이 풍성해지는 내용들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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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신고가 왜 119인지 알아?” “몰라. 왜 119야? “그건 말이지 불이 나면 출동해서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하나(1) 하나(1) 구(9)해주기 때문이야.” “에이… 무슨 그런… 그럼 범죄신고는 왜 112야?” “그건 말이지 나쁜 사람들을 일(1) 일(1) 이(2) 잡아내기 때문이지.” 물론 그런 이유로 119나 112로 정한 것은 아니고 그냥 전화번호와 관련된 우스개다.
한국은 화재신고 119와 범죄신고 112의 두 개 전화번호를 사용하지만 미국은 화재신고도 범죄신고도 모두 911이다. 미국에서 숫자 911은 세 가지 방법으로 읽을 수 있다. 나인 헌드레드 일레븐(nine hundred eleven)으로 읽을 수 있고 나인 일레븐(nine eleven)으로 읽을 수도 있고 나인 원 원(nine one one)으로도 읽을 수 있다. 응급호출 전화번호는 항상 나인 원 원(nine one one)으로만 읽는다.
한국의 119와 미국의 911은 1과 9라는 오직 두 개의 번호로만 구성되어 있다. 응급호출 전화번호로 1과 9를 사용하는 것은 한국과 미국만 그런 것이 아니고 많은 나라가 응급호출 전화번호에 1과 9를 사용하고 있다. 왜 많은 나라 응급호출 전화번호에 1과 9를 사용할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전화번호 숫자판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지금은 전화번호 숫자판이 손가락으로 누르는 버튼식이지만 이것이 나오기 전에는 다이얼식이었다. 다이얼식 전화기에는 열 개의 구멍이 뚫린 둥근 원판이 붙어있고 그 뚫어진 구멍 밑에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숫자는 1부터 시작해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9까지 간 후 마지막에 0이 적혀 있었다. 숫자가 적힌 이 둥근 원판이 다이얼(dial)이고 ‘다이얼을 돌린다’는 것은 ‘전화를 건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표현은 오래된 영화 제목 ‘다이얼 M을 돌려라’(dial M for Murder, 1954년,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그레이스 켈리 주연)에서도 나타난다.
이 다이얼식 전화기로 119로 전화를 한다고 해보자. 먼저 1번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시계방향으로 돌려서 걸림쇠까지 간 후 손가락을 빼면 다이얼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면서 1이라는 숫자가 전화국에 전달된다. 이것을 두 번 반복한다. 그리고 세 번째에는 9번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다이얼을 돌린다. 미국은 9번을 먼저 돌진 후 이어서 1번을 두 번을 다이얼 한다.
여기에서 궁금한 것이 생긴다. 눈앞에 불이 났다면 문자 그대로 1분 1초가 급한 상황이다. 그런 긴급 상황이라면 걸림쇠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1번을 세 번 돌리는 것이 가장 시간이 적게 걸리니까 응급호출 전화번호로는 111이 가장 적합한 것이 아닌가? 걸림쇠와 가장 가까운 숫자인 1번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시간을 단축하는 방법인데, 마지막에 있는 0번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저 멀리 있는 9번을 다이얼 한다는 것은 좀 의아하다. 게다가 영국은 번호 1번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는 번호인 999를 사용하고 있다.
사실 영국에서도 다이얼식 전화기 초기에는 시간이 적게 걸리는 1번에서 3번 사이의 번호를 사용해서 응급호출 전화번호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마음만 급한 나머지 전화를 걸어 응급출동을 요청하고는 출동할 주소를 말하지 않고 전화를 끊는 경우가 전체 신고의 3~5%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이얼 번호 중에서 0번을 제외한다면 다이얼을 돌린 후 원위치로 돌아가기까지 가장 긴 시간이 소요되는 9번으로 바꿨다고 한다.
9번을 돌리면 다이얼이 원위치로 돌아가기까지 약 1초에 가까운 시간이 걸리고 이것을 세 번 돌리면 모두 3초 가까운 시간이 걸리므로 이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마음을 가다듬고 진정할 시간을 갖자는 것이었는데 효과가 있어서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대부분 출동할 주소를 말했다는 것이다. 영국은 지금도 999를 사용하고 있다.
그 후 다른 나라들은 응급호출 전화번호에 1번을 사용하여 시간을 줄이더라도 전화번호에 9번을 넣어 살짝 한 템포 늦추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9번을 한국은 마지막에 넣었고 미국은 맨 처음에 넣은 차이밖에 없다.
물론 지금은 다이얼식이 아닌 버튼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9번을 이용해서 시간을 늘인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다이얼식 전화기를 사용해보지 않은 세대라면 응급호출 전화번호에 9가 들어가는 이유는 정말이지 박물관의 유물에 관한 설명과 다름없다.
가끔씩 ‘가만… 한국이 119인가 911인가?...’하고 순간적으로 헛갈리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미국의 911을 구/일/일로 읽어서 그렇다. 일/일/구와 구/일/일로 읽으면 순간적으로 헛갈릴 수 있지만 일/일/구와 나인/원/원으로 기억하면 좀 낫다. 일/일/구는 우리말이니까 한국, 나인/원/원은 영어니까 미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