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 전화벨이 울린다. 집 사람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 여기 XXX 아울렛 몰인데 나 오늘 천불 이상 벌었어.”
가슴이 덜컹한다. “알겠어. 그런데 내 옷은 아니겠지? 난 아직까지 입어 보지도 않은 옷이 넘쳐나니까 말이야.”
“아냐, 사실 내가 갖고 싶어 하던 운동화를 샀어. 그동안 199불이나 해서 엄두도 못 냈는데 글쎄 49.99불로 세일을 하더군. 그래서 샀는데 놀랍게도 카운터에 가니 그것이 49.99불 아니라 그것의 또 반값 24.99불이더군. 그러니 갖고 싶어 하던 운동화 하나 사고 175불 번거야. 그리고 내 오리털 패딩 재킷은 옛날 것이잖아. 요즈음 입을 만한 건 300불은 줘야 해. 그래서 못 사고 금년을 넘기는가 했더니 아, 글쎄 이곳에서 세일이라 하면서 99불이야. 거기다가 하나 사면 두 번째 것은 무조건 20불이래. 그래서 2개 샀지. 재킷 두 벌에 600불이 아니라 모두 쓴 돈이 토탈 120불이니까 480불 벌었지. 그리고 말이야….”
설명을 더 늘어놓으려는 와이프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알았어. 알았어. 내 것만 안 샀으면 되었어. 나 지금 뭐 좀 하고 있는 중이니 운전이나 조심해서 와.”
이것이 크리스마스 쇼핑 시즌에 우리 집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마도 대다수 중산층 가족의 풍경일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코로나 팬데믹이니 어쩌니 해도 비행장마다 승객들로 넘쳐 나고 도로마다 차로 미어지고 있다. 모두 마음들이 들떠 있어 보인다.
한국판 신문을 본다. 연말 동창회다, 무슨 단체다 하며 모임도 꽤나 많다. 그리고여러 단체에서 수여하는 장학금 또한 참으로 많다.
그리고 홈리스, 고아, 불우이웃 돕기 등 선행도 많아 훈기가 넘쳐흐르는 것 같다. 그런데 왠지 나의 마음에 뭔가 좀 빠진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큰 지주는 아니지만 양반에다가 논마지기 좀 넉넉히 가진 집에서 자란 집안 환경 때문인 듯하다.
나는 밥상에서 배가 부르지 않아도 주발에 밥을 다 비우지 않고 한 숟갈 밥을 남기고, 비린 것 생선 한 조각은 남기고 상을 물렸다. 부엌에서 누구라도 먹으라고 하는 신호로 말이다.
또 옷은 깨끗하게 입고 있었으나 결코 유난하거나 비싼 옷은 입지 않았다. 학교에 가지고 가는 도시락도 집에서 장조림 고기를 먹을지언정 반찬으로는 그저 콩자반, 멸치 볶음이었다.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다 같은 밥 먹고 산다는 표시이었을 것이다. 또 밤마다 빈방에 전등이 켜져 있으면 끄러 다니며 절약을 솔선수범해야 했다.
그것이다. 나의 마음에 이웃돕기가 넘쳐흐르지만 무언가 좀 아쉬움을 느낀다는 것이 바로 이것인 것 같다는 말이다. 가진 사람들이 베푸는 선행이랄까. 도움이 어쩌면 누구에게는 정신적으로 비참하다고 할까, 초라하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회에서 가진 사람들이 베푸는 선행들이 아주 좋은 현상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분들의 마음의 자세이어야 하며 이것이 진정 연말에 사회를 훈훈하게 만들 것 같다.
어느 꽁트의 한 줄기의 글이 생각난다. 연말 추운 길에서 거지가 동냥을 하고 있었다. 마침 지나가던 사람이 측은한 생각이 들어 돈을 주려고 하니 공교롭게도 동전 한 닢이 전부이었다.
그 노신사는 거지의 손을 잡고 동전을 쥐어주며 ‘미안허이. 돈이 이것 밖에 없구먼’ 하니까 거지가 눈물을 흘리면서 내 여지껏 이렇게 값진 동냥을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형편이 좋은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을 돕고 있는 연말 풍경에 나는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물질도 좋지만 훈훈한 마음을 함께 나누어 주자고 하고 싶다. 연말이라 모두들 마음이 들떠 있다. 그럴수록 그늘진 곳에서 살고 있는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고 배려하자는 말이다. 이것이 살기 좋은 사회의 바탕을 이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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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묵 / 문인/ 맥클린,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