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육상경기에서 가장 재미있는 종목이 1600미터 계주 경기입니다. 400미터씩을 네 명의 주자가 트랙을 한 바퀴씩 돌고 바톤을 다음 주자에게 넘기고 달리는 경기입니다. 스피드와 함께 바톤터치라는 기술적인 문제까지 매끄럽게 진행시켜야 하는 팀웍이 매우 중요한 경기입니다.
인생이라는 트랙에서 지난해와 새해라고 일컬어지는 시간의 경계가 저만치에서 안개속 바람처럼 서서히 그 모습을 보이며 바톤터치를 하려고 달려오고 있습니다.
우주 만물이 하나라는 창조주의 명령앞에 불응한 인간은 흘러가는 세월에 시간이라는 선을 그은 채 하루, 한 달, 일 년이라는 경계를 만들었고 대지 위에, 바다 위에 선을 긋고 내 나라, 내 땅, 내 것 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떠셨나요?
삶이라는 생존경쟁의 광야에서 당신의 한 해는 어떠했는가요?
우리는 광야에 서 있습니다.
수고하고 힘쓰고 고단한 나의 하루, 짓밟고 짓밟히고 보낸 나의 일상. 그게 바로 우리의 ‘광야’가 아닐까요.
내 안에서는 하루에도 순간순간마다 시도 때도 없이 올라 온 ‘악마’와 죽음을 담보로 놓고 힘들게 사투를 벌이며 빵을 만들고, 명예를 지키고, 권력을 차지하려는 유혹이 때로는 살가운 산들바람처럼, 때로는 산더미만한 파도처럼 넘실대며 나를 유혹하였습니다.
그래도 잘 버티며 살았습니다.
생물학자나 생명학자의 말을 들어보면 인간의 능력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개와 비교해서 후각이 일 만분의 일 수준이고 올빼미의 청각은 인간의 백 배나 뛰어나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마음으로 거머쥐는 것. 불교에서는 그 모두를 ‘색(色, 형상)’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만나고 타협하고 양보하고 때로는 싸우기도 하는 우리 안의 온갖 감정이 모두 실체가 없는 형상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있다’고 확신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움켜쥐려고 애쓰고 수고합니다. 그것은 집착일 수 있습니다. 붓다는 “있는 게 아니야. 그건 없는 거야. 있는 것이 없는 것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라고 하였는데, 우리는 “아니야. 이건 진짜 있는 거야. 있는 것이 있는 것 색즉시색(色卽是色)이다”라고 자신의 상황에 맞게 합리화하여 해석하고 내 주장을 앞세웁니다. 그렇게 가득 채우기만 해서 ‘빈 곳’이 드러나질 않고 더 이상 들어 설 곳이 없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어차피 바람불고 먼지나는 광야에 서있는 존재입니다.
메마르고 황량한 광야에 인간은 자신이라는 악마를 안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란 다름 아닌 ‘내 안의 악마’, ‘내 안의 욕망' 일 수 있습니다.
그 악마가 ‘나의 뜻’을 만들고 나만의 성을 쌓고 나를 지키려고 방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욕망으로 인해 우리는 외로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성탄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시간과 공간이라는 경계를 뚫고 오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인간의 시각에서 설정된 예수님 오신 날이 다가옵니다.
이 천년 전, 우리 곁에 다가오신 예수님은 욕망이라는 악마를 어떻게 허물어야 하는지 우리에게 알러주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쉽고 단호하고 명료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그분만을 섬겨라.”
이 말씀의 실천과 함께 광야의 악마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욕망의 씨앗이 자라날 터전을 나에게서 떨쳐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유혹의 뿌리가 자랄 수 없도록 ‘나’ 라는 땅에서 아예 뿌리부터 내동댕이 쳐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외치셨습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말고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 물으라."
성탄의 밤엔 휜 눈이 소복이 내렸으면 참 좋겠습니다.
하얀 눈 위에 나를 버리고 경계를 넘어 새로운 광야로 타박타박 걷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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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훈 / 클락스버그,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