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공감의 힘, 연민으로 소통하기

2021-12-22 (수) 구자빈 사회부 기자
크게 작게
청소년기에 미국으로 부모를 따라 이민을 오거나 홀로 유학을 온 1.5세들은 우스갯소리로 자신을 ‘0개 국어’ 능력자로 소개하기도한다. 영어도 어느정도, 한국말도 어느정도 구사하지만 둘 중 어느 한 언어도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답답함을 나름 위트있게 표현한 것이다.

말을 잘하고 싶었다. 단순히 타인의 귀에 들리기에 풍부한 어휘력과 뛰어난 언어구사 능력을 뽐내고 싶다기 보다는 사람의 마음에 온기를 전하며 마음을 움직이고 선한 영향력을 내뿜는 말을 구사하고 싶었다.

그런 동기를 갖고 구매한 책이 마셜 B 로젠버그 저자가 집필한 책 ‘비폭력대화(Nonviolent Communication)’였다. 책에서는 사람이 서로 마음으로 주고받는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대화할때 네 가지 요소들에 우리의 의식의 초점을 둬야한다고 말한다.


‘NVC(비폭력 대화)’ 모델의 기본원리인 네 가지 핵심 요소는 1. 관찰 2. 느낌 3. 욕구 4. 부탁 이다. 첫 번째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구체적 행동을 관찰하고, 두 번째 그 관찰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고, 세 번째 그러한 느낌을 일으키는 욕구, 가치관, 원하는 것을 찾아내고, 네 번째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부탁하는 것이다. 책은 이 네 가지 기본원리를 정확히 숙지하고 삶에 적용한다면 우리 모두의 대화 속에 연민의 꽃이 필연적으로 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처음 접한 새로운 원리와 내용에 단순히 책을 읽어나가는 것도 어려웠지만, 더 어려운 부분은 이 원리를 삶에 실제로 적용해 소화시키는 것이었다.

연말에 들어서며 최근 두 달 사이 LA 지역에서는 떼강도 행각과 피해자의 집 또는 목적지까지 따라오는 미행강도범죄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LA경찰국(LAPD)에 따르면 지난 달 26일 베벌리힐스 고급 백화점인 니먼 마커스에서 쇼핑을 마치고 한인타운 식당으로 식사를 하러 간 한인 부부는 백화점에서부터 미행해 식당 앞에서 한시간 반 동안 그들을 기다린 강도단으로부터 총기로 협박을 당하고 고가의 롤렉스 시계와 명품백, 스마트폰 현금 등을 갈취당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사건 발생 몇 주후 사건이 벌어진 식당으로 취재를 나섰다.

식당에 도착해 관계자에게 사건 정황에 대해 물으니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외진 곳으로 오라며 손짓했고 대화는 시작됐다. 마침 관계자는 사건 발생 당시 현장에서 강도 행각을 목격한 당사자였고,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한참 설명을 하던 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이건 비밀인데 기자님한테만 보여주는거에요”라고 말하며 당시 상황이 찍힌 영상을 꺼내 비밀스럽게 보여줬다. 영상을 보며 심장 박동수가 살짝 빨라졌다. 취재시 가장 중요한 것이 당시 상황이 찍힌 현장의 감시카메라 영상을 입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도사건이 보도되면 업소 영업에 피해를 끼칠까 우려하는 경우가 있어 영상을 받는 것은 쉬운 미션은 아니었다. 거절당할 가능성을 무릅쓰고 물었다, “혹시 이 CCTV 영상을 받을 수 있을까요?” 친절하던 그의 얼굴은 단숨에 굳었고, 그는 “그건 안 돼요”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절박한 설득은 한 시간 동안 이어졌다. 이런저런 설명을 하며 거듭 부탁했지만 그의 태도는 완강했고, 포기하고 싶어질 즈음에 갑자기 NVC 공식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그래서 서툴지만 대화에 공식을 한스푼 얹어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과 말,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며 그의 욕구와 느낌을 추측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대화를 풀어나가다보니 그가 영상을 제공하면 일하는 식당에서 해고당할 것이라는 생각에 두려움과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안정적인 고용 상태를 원하는 그의 욕구와 직장을 잃을까 두려운 그의 마음에 최대한 공감하며 솔직하게 서로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는 한시간 반 만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이해받았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렇게 상대의 욕구와 느낌에 의식의 초점을 두고 공감하는 대화를 진행한 끝에 결국 대화 속에서 연민의 꽃이 피어났고, 그는 영상 화면을 캡처해 식당이 보이지 않도록 잘라낸 사진을 전송해주었다.

증오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된 이후로는 다방면에서 삶이 피폐해져 많은 이들이 각자의 입장만 피력하며 가시돋힌 말을 쏟아내고 서로를 상처주기 일쑤이다. 그 어떤 때보다 비폭력대화가 필요한 시기이다. 폭력적인 세상 속에서 서로에게 공감하려 애쓰는 대화를 시도한다면 어둠 속에서 피어난 연민의 꽃이 내뿜는 은은한 향기가 세상을 가득 채우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품어본다.

<구자빈 사회부 기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