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크 들고 달려온 격동의 40년
▶ 한인섭 전 VOA 국장의 취재파일 ②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경제발전상을 전하던 VOA KBS 공동취재팀(좌로부터 한인섭 VOA 기자, 브래들리 미국공보원 방송관, 고성호 KBS 프로듀서
한국의 중소기업을 찾아 취재하는 한인섭, 고성호
한인섭 미국의 소리(VOA: Voice of America) 전 한국어방송 국장의 취재 파일을 연재한다. 서울 생인 한 전 국장(85)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마치고 1965년 VOA에 입사했다. 그 후 40년 동안 한반도를 둘러싼 요동치는 현대사의 참모습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마이크를 들고 뛰어다녔다.
‘마이크 들고 달려온 격동의 40년’이란 제목의 이 연재물에는 유신체제에서 탄압 받은 실상, 한미관계와 광주사태, 6월 민주항쟁, 북한 탐방, 유엔 가입과 남북한 외교관들, 백남순 북 외무상 회견,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와의 면담 등 흥미로운 현대사와 비화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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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 주한 미 대사관 공보요원 취업
1965년 어느 여름날 공군 선배로부터 주한 미국 대사관 공보원(U.S. Information Service - USIS)에서 ‘미국의 소리’ 방송요원을 구하는데 관심이 있냐고 묻는 전화를 받았다. 그 당시 필자는 공군 중위로 제대하고 마땅한 일자리를 찾고 있던 중이었고 제대하기 전에는 공군본부 정훈감실에서 4년 동안 공보업무를 보았던 터라 구미가 당기였다.
더구나 6.25 전쟁 때 아버지와 대청마루 지하실에서 몰래 ‘미국의 소리’가 전하는 인천 상륙작전 소식을 들으며 15세 어린 나이에도 ‘미국의 소리’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과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공보원 방송관 홀브루크 브래들리(Holbrook Bradley)씨의 면접과 소정의 신원조회를 거쳐 필자는 그 해 9월 13일자로 주한 미국 대사관 공보원 언론담당 전문관(Media Specialist)으로 채용되었다. 주요 업무는 한국의 방송국들과 프로그램을 제휴하고 인터뷰 프로그램을 만들어 워싱턴에 있는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VOA) 방송국에 보내는 일이었다.
그때는 주한 미국 공보원과 워싱턴 ‘미국의 소리’가 다 함께 미국 연방정부 내 해외공보처 (United State Information Agency: USIA)의 산하기관이었기 때문에 공보원 직원이 된 필자는 자동적으로 ‘미국의 소리’ 서울주재 기자의 역할도 맡게 되었다.
# 한국 근대화 과정 취재
KBS 프로듀서 고성호씨(高聖鎬, 후에 李連浩씨로 교체)와 필자는 그 당시 최신형 휴대용 녹음기 ‘나그라’(Nagra)를 짊어지고 한 달에 일주일 정도 전국 방방곡곡을 함께 누비며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경제발전의 실상을 공동 취재하여 ‘한국의 근대화’(Modernization of Korea)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제작하고 KBS와 VOA를 통해 방송했다.
먼지가 나는 비포장 길을 달려 중소기업을 찾아 가기도 하고, 비행기를 타고 대구, 부산, 광주, 제주도까지 날아가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비행기는 대한항공이 민영화되기 전에 운항하던 소형 프로펠러 기였다.
어느 날 서울-강화 간 먼지가 풀풀 나는 길을 달리면서 우리가 짜증스럽게 말하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이 도로가 포장되면 그때에 우리는 대한민국이 근대화 됐다고 말 할 수 있겠지.”
# 한국 방송국들과 음악 테이프
그 당시(1960년대 중반) 한국은 박정희 장군이 주도하는 군사정권 하에서 5개년 경제개발에 착수하여 국가경제가 막 도약의 기틀을 잡고 있었다.
제1차 5개년계획(1962∼1966) 기간 중에 외국에서 돈을 빌려와 시멘트, 비료, 정유, 전기, 철강 등 산업 발전에 바탕이 되는 기간시설(基幹施設)을 구축했으며 수출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결과 경제발전의 기틀이 차츰 형성되었고 수출이 조금씩 늘어났으며, 국민 소득도 점차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1인당 국민총생산은 아직도 100달러를 조금 웃도는 수준이었다. 일제 36년간의 착취와 6.25 전란의 폐해가 워낙 커서 국가경제가 거의 완전히 절단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한국 방송국들의 재정도 매우 어려웠다. 미국공보원이 무료로 제공하는 음악 테이프가 방송국들이 환영하는 품목 중 하나였는데 음악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어서 보다는 한국의 방송국들이 자체의 프로그램을 녹음하여 방송하는데 그 테이프들이 요긴하게 재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에서 녹음테이프는 그만큼 진귀한 품목이었다. 지금부터 50여 년 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