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동기동창생 중에 퇴계와 백범, 졸병과 5성장군, 벌레와 바이러스가 있었다. 별명들이다. 본명은 각각 이황, 김구, 최병정, 최원수, 이번래, 김균이다. 최근 한국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탈락한 정세균 전 총리도 코비드 방역 총괄책임자로서 ‘세균 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길 은근히 바랬단다. 김세균 전 정의당 공동대표의 별명도 아마 비슷했을 것 같다.
별명을 본명에서 따는 게 다반사지만 별명 같은 본명을 가진 사람도 많다. 왕복근, 복기왕, 고오환, 장백산 등 정치인이 그렇다. 조정치(가수), 이정치(내 동창생), 정치인(축구선수)은 정치인이 아니다. 배우 문소리, 고수, 안내상, 이성경, 남다름과 방송인 이파니, 김석류, 만화가 오 똑(별명은 강냉이)도 본명이다. 가수 조휴일은 일요일에 출생해서 붙여진 본명이다.
김치국, 백김치, 우동국, 김생선, 임신중, 석을년, 지애미, 신호탄, 손가락, 하지만, 하숙년, 방귀남(방귀녀도), 천방울 등도 별명 같은 본명들이다. 옛날엔 더 심했던 모양이다. 고려 문관 중에 왕ㅈ지, 김ㅈ지가 있었고 조선 문관 중엔 김ㅂ지, 고약해, 이시발이 있었다. 미국팝송 ‘You, You, You’가 60여년 전에 히트했지만 이미 고려 때 유유유라는 사람이 있었다.
생김새나 행동거지에서 딴 별명도 엄청 많다. 전봇대, 짱구, 왕눈깔, 자가발전(대머리), 노랭이, 오리발, 카사노바, 양아치 등이다. 뒤틀려진 별명도 있다. 스스로 ‘거듭났다’며 ‘중생’이라는 별명을 자랑했던 한 교인은 ‘중성’으로 통했다(그는 이 씨다). 안목 없는 직장선배가 한 때 나를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고 불렀는데 많은 사람이 이를 ‘배불뚝이’로 알아들었다.
중학교 시절 말투 때문에 희한한 별명을 얻은 영어선생님이 있었다. 그 분은 정말 희한하게도 관계대명사 which를 ‘휘치’ 아닌 ‘호이치’로 발음했다. 할아버지 연배 교사의 케케묵은 일본식 발음이라며 학생들이 키득거렸지만 선생님은 “녀석들아, 내가 미국사람에게서 분명히 확인했어!”라며 더 또렷하게 ‘호이치’라고 발음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희한한 사고가 터졌다.
그 날 선생님이 수업을 마치고 교실에서 나가자 한 짓궂은 녀석이 뒤쫓아가 ‘호이치’라고 외쳤고, 선생님이 되돌아와 녀석의 뺨을 연거푸 갈기자 반 아이들이 잠잠해졌다. 무릎 꿇고 울며 사죄하는 녀석을 한동안 식식거리며 내려다보던 선생님이 털썩 주저앉더니 “많이 아팠냐?”며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두 사람은 다음 수업 시작종이 울릴 때까지 함께 훌쩍였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은 거의 모두 별명이 있다. 초대 워싱턴은 누구나 ‘국부’로 부른다. 링컨은 정적들이 ‘오리지널 고릴라’로 불렀지만 ‘정직한 에이브’가 오리지널 별명이었다. 토머스 제퍼슨은 ‘민주주의 사도,’ 연설문을 몸소 쓴 우드로 윌슨은 ‘문장가,’ 4선을 연임한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백악관 남자,’ 지미 카터는 ‘땅콩농부,’ 로널드 레이건은 ‘위대한 소통가’였다.
별명이 별로인 대통령들도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리처드 닉슨은 ‘교활한 딕,’ 모니카 르윈스키에 ‘삽입’하지 않았다고 변명한 빌 클린턴은 ‘뺀질이,’ 임기 중 불법체류 외국인들을 마구 추방시킨 버락 오바마는 ‘추방 국가원수,’ 지금도 재선을 도둑맞았다고 헛소리하는 도널드 트럼프는 ‘음모론 국가원수,’ 현직 조 바이든은 ‘슬리피(잠 오는) 조’로 불린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 별명은 한결같이 얄궂다. 박통(박정희)과 전통(전두환)은 단축호칭을 겸한 조폭식 별명이다. 노태우는 ‘물태우’나 ‘보통사람,’ 김영삼은 ‘공삼(03)이’ 아니면 ‘닭모가지,’ 김대중은 ‘인동초’ 또는 ‘슨상님’(선생님의 전라도 사투리), 노무현은 ‘놈현’ 또는 ‘노짱,’ 이명박은 ‘쥐박,’ 박근혜는 ‘닭근혜,’ 현직 문재인은 ‘문재앙’ 아니면 ‘문죄인’으로 폄하된다.
차기 대통령도 뻔하다. 윤석열이 당선되면 ‘윤도리’나 ‘윤쩍벌,’ 이재명이 당선되면 ‘이 찢’(형수에 퍼부은 욕설) 또는 ‘이죄명’으로 불릴 터이다. 한국 대통령들의 별명이 얄궂은 건 본인들의 인품 탓일 터이다. 내가 60여년전의 ‘호이치 선생님’을 아직 기억하는 건 그의 요상한 발음이 아닌 인품 때문이다. 그는 놀랍게도 그날 사건 이후 which를 ‘휘치’라고 발음했다.
<
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