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프가 만난사람 - 문흥택 전 워싱턴한인연합회장
#추수감사절과 원로
속세에서의 수확과 나눔을 의미하는 추수 감사절은 11월 말에, 영적 세계에 대한 통찰을 의미하는 성탄은 12월 말임이 의미하는 바 크다.
한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인사회 원로 되시는 분이 저녁에 초대하고 내가 출간한 ‘제프의 시간여행’을 구매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는데 절대 자신의 신분을 알리지 말라고 부탁했다 한다. 누가 저녁 초대 하면서 신분을 굳이 숨긴다 말인가? 답답한 마음에 지인에게 다시 연락을 취하니 서로 잘 아는 사이라는 말 이외에는 또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책을 구입하겠다는 사람을 기피할 수도 없고 자신의 신분을 숨기니 더욱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만 참았다. 식당에 들어서 보니 놀랍게도 초청해 주신 분은 20년 전 워싱턴한인연합회장을 역임하셨던 문흥택(84) 고문이었다. 서로 웃으며 왜 신분을 안 밝히셨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답변이 시원했고 그다웠다.
얼마 전인가 식사를 함께 한 후 내가 식대 계산을 하면서 그분 손목을 잡으며 “그 동안 우리 사회를 위해 봉사 많이 하셨습니다. 앞으로는 제가 계산 할 생각이니 절대 식대 내지 말아주세요” 하며 강경히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만나자고 하면 혹시 안 나올 까봐 신원을 숨겼다는 말씀에 우리 모두 박장대소 할 수밖에 없었다. 후배를 아끼는 마음이 읽혀지는 부분이다.
일단 책에 사인을 하고 정중히 건네 드리니 원로 분은 인자한 웃음을 지으시며 “안 회장, 우리 벌써 서로 안 지가 40년이 넘었어!”하신다. 소맥이 오고 가는 사이 그 분이 젊고 힘 있던 시절, 영어도 짧은데 7-11에서 백승환 씨(전 세탁협회 회장)와 최광수씨(전 수도권 MD 회장, 작고) 등을 만나 #1, #9 등 여러 7-11(당시 7-11은 각 가게들마다 숫자가 매겨져 있어서 숫자만 대면 어느 가게인지 금방 인지 할 수 있었다)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었던 일화들을 마치 주마등 지나가듯이 말씀하셨다.
7-11 입사 얼마 후 물품 오더를 꼼꼼히 잘하는 것을 지켜본 지역 수퍼바이저가 어느 날 적자로 허덕이던 우범지역 7-11 매니저로 출근하라며 가게 열쇠를 건네주어서 설레는 마음에 한 밤중 그 길로 가게로 달려갔다고 한다.
# 돈 통 들고 나오던 7-11 직원
밤 12시도 넘은 시각, 텅 빈 7-11 주차장에 들어서니 야밤 근무 직원이 돈 통을 통째로 들고 가게 밖으로 나오더라는 것이다. “안으로 밖으로 모두 도둑놈들이니 적자가 나는 것이 당연하지” 하시며 혀를 차신다.
그렇듯 어려운 여건에서도 수많은 한인들이 7-11에서 시작하여 제 각각 성공의 길을 걸어 왔던 기억들을 말씀하시면서 한인들은 동업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여러 명이 합심해서 시작했던 B Green 도매 사업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동업자 중 몇 분은 큰 체인 스토어를 운영하는 큰손으로 발전하셨다.
물론 문 원로도 로슬린에서 한인으로서는 가장 큰 카페테리아를 오랜 기간 운영하셨다. 옛 이야기로 흥이 오를 무렵 문 고문이 선물함을 나에게 건네주시면서 “안 회장 시계 수집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내가 이제 나이도 들고 해서 안 회장이 적절히 처분해주게나” 하셨다. 받아보니 그 안에는 수십 가지 선물용 시계들이 들어 있었다. 단체장 직책에 있으셨을 당시 받으셨던 시계들을 내게 주시는 것이었다.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지인은 눈치 없게도 “나도 저런 시계 너무 많은데” 하며 사뭇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말을 하기에 나는 더욱 머리 숙여 그분의 깊은 성의에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원로는 “요즘 이런 시계 인기 없겠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어야지” 하시며 시계들을 바라보시는 모습이 옛 추억들을 회상하시는 듯 했다.
# 대도 무문- 큰길에는 문이 없다
복지센터, 향군협회, 골프협회 등 마크가 각인된 시계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연이 있을 듯 싶었고 서청원, 한화갑 시계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세도가들의 일장춘몽을 말해주는 듯 했다. 그분이 추미애 시계를 바라보시며 야당 초선의원 시절 사무실에 찾아가니 먼 길을 오셨다며 정중히 마중하며 택시를 타고 떠나는 순간까지 큰 거리에 까지 나와 배려해주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미디어에서 자주 접하는 그녀의 딱딱하고 상기된 이미지와 사뭇 다른 면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다른 시계들과 달리 유독 노무현 전 대통령 시계는 사각형이었고 앞면 시계 유리마저 깨져 있었다. 시계 뒷면에는 ‘원칙과 신뢰 새로운 대한민국’이라고 선명히 새겨져 있어 그분의 철학을 대변하는 듯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시계 뒷면에는 그의 완고한 의지를 보여주듯이 ‘대도무문’ 이라 적혀 있다.
문 고문에게 물었다. “걸어오신 삶에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무엇인가요?” 돌아온 답변은 간결 했지만 ‘찡’했다. “가정을 안 돌본 것이 후회 되네.” 남자가 큰길에 나서면 거침이 없어야 된다. 그러나 밖으로만 돌면 자신의 집 문과 가정은 누가 챙기나?
한인 커뮤니티 센터 건립을 위해 매리언 베리 시장 시절 DC 소재 학교 건물을 무상으로 받는 것이 진행되었지만 무산되고 탐 데이비스 연방 하원의원을 움직여 폴스처치 소재 윌스턴 스쿨(Williston School)을 무상 임대 받아 한인들만 사용하게 되었는데 여러 시행착오로 현재는 여러 민족들이 들어선 multi-cultural center 로 바뀌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한때 미주 전국체전 등이 열기를 뿜으며 미주 각 대도시에서 개최되곤 했는데 한인 커뮤니티 센터에 운동장과 강당 등이 있었으면 좋았을 걸 하시며 아쉬워하신다. 이제 한인들이 십시일반으로 한인 커뮤니티 센터가 마련되었으니 합심하여 잘해 나가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일단 선물로 받은 시계들은 잠시 내가 소장하겠지만 언제인가 한인 박물관이 열린다면 그곳에 기증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원로님을 배웅하는데 건장 하시던 모습과 힘찬 목소리가 그리워 오며 안쓰러운 마음에 가슴에 찬바람이 일었다.
문의 Jahn20@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