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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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륵같은 전자제품

2021-11-22 (월) 박명희 전 한국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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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륵(鷄肋), 닭의 갈비라는 뜻으로 버리기에는 아까우나 그다지 쓸모가 없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요즘 애들은 참 조용하다. 핸드폰과 게임기만 있다면 말을 잘 듣는다. 밥 먹을 때도 ?아다닐 필요없이 헤벌린 입에다 집어넣고, 손님이 있거나 운전을 할 때도 만화영화 한 편만 틀어주면 서로 싸우고 우는 일도 없이 교양있는 가족이 된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도 누구나 조용하다. 예전에는 큰소리로 통화하느라 눈총을 받았지만, 지금은 조용하게 모두들 좀비처럼 아무말 없이 이어폰을 꼽으면 옆에서 누가 쓰러져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 가족들도 각자의 핸드폰을 옆에 놓고 수시로 보고, 형제자매끼리도 카톡이나 메시지를 보낸다.

예전엔 전기도 아껴야 잘 산다고 스위치마다 절전 스티커가 붙어있고, 나갈 때는 뺄 수 있는 모든 전기코드를 빼고, 수돗물도 꼭 잠그고, 가스도 잠그고 나갔다. 지금은 그놈의 인터넷과 컴퓨터로 연결된 것 때문에 천재지변이 아니곤 절대로 끄면 안 되는 전기제품이 대부분이다. 수없이 늘어진 전선줄들을 볼 때면 우리는 온갖 생명줄을 주렁주렁 매단 중환자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이러다 어느 날 전기와 컴퓨터가 없어진다면 어찌될까? 죽지는 않겠지만 죽을 것 같을까? 정말 죽을까?


미국에 온 몇년 뒤에 눈이 엄청 와서 일주일을 전기 없이 살았다. 가스오븐을 라이터로 켜고, 불 꺼진 냉장고에서 상해가는 재료로 잡탕찌개를 만들어 환할 때 서둘러 먹고, 4륜차만 다니는 큰길까지 온 동네 사람들이 힘을 합쳐 집집마다 길을 만들며 틈틈이 핫초코, 커피, 인삼차, 컵라면을 나누며 계속 퍼붓는 눈 속에서 친해졌다. 걸어서 마켓에 가고, 촛불을 켜고, 10겹쯤 옷을 껴입고 하루를 자고 나니 온몸이 얼어버렸다. 다음날 다행히 전기가 들어온 동생네로 피난가서 따뜻한 샤워를 하고 전기장판에서 지지고 나서야 얼어 돌아간 입과 몸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전기가 들어온 날 온 동네 사람이 브라보와 만세를 외쳤다.

몇 년 뒤 이번엔 허리케인 물폭탄으로 뒷집은 나무가 거실로 쓰러지더니 한여름에 전기가 나갔다. 냉장고 김치는 보글보글 올라오고, 상하기 시작한 과일로 배를 채우고 냉동실 고기는 온갖 조림이 되었다. 그 뒤로는 정신 차려 내 나름대로 전기제품은 더이상 안 사려 애쓰는데도 서랍에는 구형 전화기와 충전기 이어폰이 가득하고 전기팬, 크고 작은 청소기, 전기주전자, 전기냄비, 커피메이커 등이 창고에 가득하고, 바깥 창고에도 잔디 깎기, 전기톱, 붕붕이, 온갖 공구도 널려있다.

냉장고, 냉동고, 김치냉장고 2대까지 꽉꽉 채우기에서 꼭 필요한 것만 장을 보았더니 김치냉장고와 냉동고가 없어졌는데도 불편하지 않다. 믹서와 주서기 대신 강판과 채칼과 양파자루로 갈고 자르고 즙을 만든다. 전기토스터, 에어 프라이어보다 코팅 잘된 프라이팬이 훨씬 편하다.

우리는 계륵같은 전기용품을 사기 위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계속해서 새로운 쓰레기가 되는 제품을 사기 위해 아끼고 모아서 또 산다. 무엇이든 누군가에게 필요하면 나누어주고 싶은데 쓰던 건 별로라고 생각하기에 주저하게 된다. 그리 결심하고 나서도 올해에는 아픈 내 무릎을 위해 대신 물걸레질 하는 로봇청소기를 사서 잘 부려먹고 있다고 위안을 한다. 어찌됐든 아껴야 잘 산다면서도 한편으론 너무 아끼다 똥 되는 것도 있으니 슬기롭게 살기가 참 어렵다.

<박명희 전 한국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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