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날씨가 심상치 않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작년보다 좀 더 추운 느낌이다. 기후학자들은 이번 겨울이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추위가 올 것이라고 한다. 월동준비를 잘해야 할 것 같다.
11월을 가톨릭교회에서는 위령의 달이라 한다. 즉, 죽은 모든 이들을 위해 특별히 한 달 동안 기도하는 달이다. 11월1일은 모든 성인의 날(All Saints day)이다.
이날은 특별히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느님의 영광을 누리는 모든 성인, 성녀들을 기리는 날이다.
특별히 교회 전례력 안에서 기념하지 않는 성인들을 기리는 날이기도 하다. 그다음 날은 위령의 날(All Soul’s day)이라고 해서 죽은 모든 이들을 위해 특별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면서 기도하는 날이다.
미사 강론 중에 교우들에게 ‘사람이 자기가 죽는 날을 알고 있으면 행복하겠습니까? 아니면 불행하겠습니까?’하고 물어본 적이 있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면서 행복하다는 분들도 있고 불행하다는 분들도 있다. 과연 자신이 죽는 날을 안다면 어떨까? 아마도 불행할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행복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자기 죽음의 날짜를 안다면 과연 우리는 우리의 꿈과 희망과 미래에 대한 설계를 자신 있게 할 수 있을까? 나의 직업을 선택하고 나의 배우자를 만나고 가지고 있는 직업에 만족하며 자손을 보고 하는 일상에 행복을 누리고 살 수 있을까? 쉬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유명한 정신과 의사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bler-Ross)는 죽음의 소식을 받아들이는 단계는 흔히 부정(Denial), 분노(Anger), 타협(Bargaining), 우울(Depression), 수용(Acceptance)이라는 5단계가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 과정은 순서대로 오지 않는 경우도 많고 사람에 따라서는 거치지 않는 단계도 있다. 때론 각각의 단계가 서로 혼재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퀴블러 로스의 이론은 암환자나 불치병환자를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이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 날짜를 알면서 건강하게 사는 사람도 이 죽음의 수용 5단계를 거쳐서 마지막 단계에 이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서양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사고방식은 동양 사람들과는 사뭇 다르다. 30년 전 신학생 시절에 군대를 제대하고 미국에 살고 계시던 친척 집에 신세를 지면서 미국 생활을 8개월 정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 시절 가장 인상 깊은 것 중의 하나가 도시 한복판에 묘지가 있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또한 유치원 아이들이 그 묘지에 와서 놀고 있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죽음이라는 것이, 현세의 삶과 분리가 아니고 잠시 떨어져 있는 것일 뿐이고 언젠가는 다시 만나야 하는 필연적인 삶임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묵상을 하게 되었다.
동양 문화권에서는 죽은 이들의 묘를 산중에 사용한다. 현재의 삶과 많이 떨어진 곳에 사용한다. 그 묘지 방문 역시 1년에 한두 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조상에 대한 예를 소홀히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서양과는 사뭇 다르다.
죽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에 있어 필연적인 것이다. 누구에게나 피해갈 수 없는 통과의례이기에 우리는 그저 담담하게 살아가고 있다.
담담하게 살고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 꿈을 갖고 그 꿈을 향해 열심히 살아간다. 왜냐하면,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는 죽음의 날을 모르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는 모습들을 보면서도 나의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날짜를 모르기 때문이다. 맞다. 모르고 사는 것이 행복하다. 그래야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소설도 쓰고 직장도 갖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나의 죽음에 대해서 몰라야만 이 현실의 삶에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살 수 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온다. 죽음을 기억한다면 실망하고 좌절할 수 없다. 그 반대로, 더 신바람 나게 삶을 살고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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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철 / 볼티모어 한국순교자천주교회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