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히토 일왕의 조카 마코(30) 공주와 10월26일 결혼한 고무로 게이(30)가 뉴욕 변호사 시험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힘들게 사랑하고 결혼했는데 변호사 시험에 떨어져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든다.
안 그래도 일본 국민의 눈치를 보느라 결혼 축하의식 없이 관할 지자체에 혼인신고만 하고 지참금도 포기한 고무로 마코. 현재 도쿄의 한 아파트에 임시로 머물며 뉴욕 신혼생활을 준비 중이었다.
지난 31일 일본 모든 언론은 고무로가 뉴욕주 변호사 시험에 불합격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변호사 시험에 9,227명이 응시하고 63%인 5,791명이 합격했고 불합격자는 3,436명인데 그중 한명이 고무로다’ 며 부정적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마코 공주와 평민 고무로는 일본 국제기독교대학(ICU) 동기로 5년 전 대학에서 처음 만났다. 마코는 이곳에서 예술과 문화유산을 공부했다. 2017년 9월 약혼을 발표하자 고무로 모친의 금전문제를 둘러싼 논란으로 일본국민들은 ‘이 결혼 반댈세.’ 하고 나섰고 결혼한 공주에게 주는 정착금 130만 달러 때문이라는 억측까지 나왔다. 결국 결혼은 연기되었고 고무로는 일본을 떠나 2018년 8월 뉴욕 포담대 로스쿨에 진학했고 이들은 인터넷으로 사랑을 이어나갔다.
고무로는 내년 2월에 다시 시험을 치를 것이며 더 열심히 하겠다고 한다. 그동안 잘못된 보도에 대한 두려움, 스트레스, 슬픔으로 아팠던 마코의 병증이 이번 고무로의 불합격으로 인해 재발하지 않기 바란다.
다이쇼 덴노(1879~1926)의 직계자손은 남자들은 모두 히토(仁)으로 끝나는 이름을, 여자는 코(子)로 끝나는 이름을 가지며 성씨는 없다. 일본 왕실 구성원은 성씨가 따로 없는 것은 저들의 논리로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는 이유다.
1947년 미군정 일본 통치시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지침과 명령으로 쇼와 덴노의 인간선언이 있었다. 이후 신의 후손이 아니라 모두 인간이 되었다. 참으로 인간적인 사랑을 한 마코, 이제 일본 국민이나 언론은 마코 공주를 잊어주어야 한다.
일본 여성의 지위가 가장 낮았을 때는 15세기 중엽~16세기에 걸친 전국시대였다. 1467년 아들을 쇼군에 앉히려는 어머니의 욕망으로 시작된 오닌의 난이 11년간 계속되면서 시작된 전국시대는 사무라이 하극상 시대였다. 공주들은 정략결혼으로 인질이 되었는데 다이묘끼리의 사돈 맺기는 권력 싸움에 입지를 넓히기 위해서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복여동생 아사히 히메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정략결혼 시켰다. 이미 남편과 아이가 있는 44세 여동생을 도로 데려와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보냈다. 하층민 여성들은 돗자리 하나를 등에 지고 다니면서 남성이 원하면 아무 곳에서나 이 돗자리를 펴고 드러누웠다. 천하통일을 꿈꾸는 자들의 무대 뒤에서 여성들의 삶은 이렇게 고달팠다.
원시시대 일본은 모권이 존중받았으나 무사계급 출현과 더불어 부권중심 가정이 되면서 여성들은 가정의 소유물이 된 것이다. 명치유신 이후 기독교적 청교도주의가 들어오면서 여권 신장운동이 일어났으나 여전히 일본여성에게는 순종적이고 남성을 위하는 이미지가 남아있다.
나이 30된 마코의 남편이 왜 국민들의 마음에 들어야하는지, 고무로의 모친이 미혼모라 더욱 부정적이었다는데, 여성인권은 어디 갔는지?
현재 뉴욕의 법률사무원 수입으로는 맨해튼 아파트와 생활비가 힘들 것이다. 그래도 부부는 어려울 때 서로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 각자 형편에 따라 남편 대신 아내가, 아내 대신 남편이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마코는 2017년 약혼소식을 전하면서 “태양처럼 밝게 웃는 그의 미소에 끌렸다”고 했다. 고무로가 아침이면 맨해튼 거리를 걸어 법률사무소로 출근하고 저녁에는 시험공부를 하는 모습, 평민 마코가 메트 뮤지엄 큐레이터로 바삐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마코의 사랑을 지지한다.
<
민병임 뉴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