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중순 ‘개화기의 선각자들의 행적’이란 주제 강의를 아주 흥미롭게 들었다. 강의 중에 고무신이 1915년에 보급되기 시작하였다는 말을 듣고 꽤나 충격을 받았다. 사실 내 세대 사람들은 4.19 의거의 시발이 부정선거이고 그때까지 부정선거는 바로 매표이며 매표의 상징은 고무신이어서, 고무신 하면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이 고무신 한 켤레에 매수 당하며 투표를 했다는 생각으로만 연결 지어졌었다.
그러나 강사의 설명인즉 고무신의 보급으로 비가 오는 날에도 외출이 가능했고, 십리, 이십리도 쉽게 나설 수 있어 사람들이 세상을 좀 더 넓게 볼 수 있게 돼 개화기를 맞이하는 마음의 준비에 한 역할을 했다는 말에 새삼 무릎을 쳤다.
105년 전에 고무신이 사람들의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혁명이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기차, 자동차, 전화, 비행기 정도가 아니라 인터넷, 휴대전화 등의 등장으로 세상은 숨 쉴 사이도 없이 인식의 변화랄까 사물을 보는 마음의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에서 들려오는 요즈음 추세, 특히 젊은 사람들의 세상의 변화를 나의 완만한 속도로 변화에 적응하는 눈으로 보자니 아주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대장동이니 뭐니 사기집단 같은 화천대유인가 하는 집단이 1조 6천억 원 이상을 해 먹어도 불법이니 어쩌니 하기보다 그놈들 참 놀랍다, 잘 해 먹는구나, 참 부럽다 하고 있는 사람들이 꽤나 있는 것 같아 이해도 안 되고 걱정스럽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은 언제나 영화가 대변한다. 바로 그 박근혜 대통령 시절인 2014년 12월 ‘국제시장’이란 영화가 나와 최고의 흥행으로 국민들의 인기를 끌었다.
그 흥행 영화가 나온 지 7년 조금 못되어 ‘오징어 게임’이란 영화가 나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그 영화가 긍정적인 모습으로 세계인으로부터 환호를 받고 있는 것이냐 아니면 나쁜 이미지를 주는 것으로 보고 있느냐 생각을 하면 마음이 좀 어둡다.
세계 2차 대전 후 프랑스에서 소위 느와르 영화가 만개했었다. 장 가방, 알랭 들롱 같은 걸출한 배우들이 출연한 ‘현금에 손대지 마라’ ‘암흑가의 두 사람’ 같은 영화가 만들어졌고, 나 또한 느와르 장르에 매료되어 워싱턴 뒷골목인 베닝 로드를 중심으로 ‘워싱턴의 달동네’ 등 소설을 출간한 바 있다. 영화이건 소설이건 어디까지나 휴머니즘, 인간의 존재를 위한 기본적 윤리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나? 오징어 게임은 그렇지 않다. 마음을 편하게 하지 않는 것은 이 영화를 환호하는 사람도 많고 심지어 노벨상을 받아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다.
1938년 중일전쟁 중 남경대학살이 있었다. 당시 일본 장교들이 누가 빨리 사람들 목을 더 많이 베느냐 내기를 하며 일본도로 마치 허수아비 목을 베듯 하는 장면을 보고 세계를 놀라게 했고 특히 한국인들의 공분을 샀다. 70년이 지난 오늘의 영화 ‘오징어 게임’에서 이러한 장면에 그저 재미가 있다고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오늘 사회의 흐름인가? 그리고 그대로 흐름이라 여기고 묵과할 것인가? 아니다. 바람직하지 않는 세상으로 흘러서는 안 된다. 또 세상을 냉소적으로 보아서도 안 된다.
한국의 집권층 특히 586세대를 흘겨본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현 집권층의 최대의 잘못은 오징어 게임 같은 영화의 출현,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도록 그들이 만든 사회 풍토라고 본다. 케케묵고 인기 없는 말을 해 볼까? 의식구조를 바뀌게 새마을 운동이라도 벌여야 하나?
<
이영묵 문인/ 맥클린,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