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인가 봅니다. 제법 높은 산 정상에서 밤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늘에는 달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달을 진리에 비유한다고 합니다.
그 진리가 우리의 가슴에 그대로 내려와 앉았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들 마음이 진실해져서 사람이 바로 하나 하나의 산이 되고, 사람이 바로 하나 하나의 바람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산 정상에서 맞이하는 가을밤은 웬지 모를 슬픔이 묻어 있습니다. 산 아래 세상에서 한숨과 슬픔이 섞여서 골짜기를 타고 정상 끝에 다달아 가뿐 숨을 몰아 쉬고 하늘로 오르려는 발버둥으로 새벽 산 정상에 부는 바람은 맹수의 표효처럼 골을 타고 넘어 갑니다.
바람에 흔들려서 지쳐버린 높은 나무 잎사귀는 이미 파스텔톤의 가을을 묻혀 상실의 그늘과 슬픔의 무늬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무언가를 떠나보내거나 잃어버릴 때 우리의 무릎은 꺾이게 됩니다.
그렇게 무릎이 꺾일 때 비로소 우리 안에 빈 공간이 생기게 되고, 슬픔과 상실의 그늘이 자리잡게 되는것 같습니다. 이때서야 우리는 비로소 외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별 후에서야 슬픔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슬픔 또한 나 자신 입니다. 나를 알아가면서 내 자신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존재하고, 악이 있어야 선이 그 모습을 보여주듯이 우리들의 일상속에는 언제나 슬픔과 행복이 구름과 바람의 관계로 우리를 떠 받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차동엽 신부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말이 있다. ‘슬픔은 비와 같다. 장미꽃을 피울 수도 있고, 진흙탕을 만들 수도 있다.’ 결국 슬픔도 선택의 문제다.” “슬픔과 절망을 겪지 않은 사람의 삶은 싱겁다. 그래서 누리는 행복도 싱겁다. 우리가 명심할 건 슬픔의 끝에 위로가 있다는 거다. 슬픔의 크기와 비례하는 위로가 말이다. 그걸 가슴 깊이 받아들이면 희망이 생겨난다. 고통이 와도, 슬픔이 와도 두렵지만은 않게 된다. 그 고통의 끝에 무엇이 있는 줄 아니까."
슬픔에서 벗어나야 그 슬픔이 주는 의미를 알 수 있듯이 살아가다 보면은 많은 것이 잊혀지고 떠나고 잊혀진 후에야 소중한 인연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슬픔속에서 당신이 기억되고 만나보고 싶은 까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듯 가을에게 자리를 내어준 계절은 상실감에 눈물 젖은 눈빛을 하늘을 향해 구애를 해보지만 이미 주도권을 틀어진 가을은 바람결에 곱게 무늬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미 가을은 여름을 향한 애닳픈 꽃이 되었고 여름은 가을을 향한 서러운 꽃이 되어 서로의 볼을 쓰다듬고 있습니다.
이별은 서로의 눈물 속에 상실의 그늘을 만들며 자연속에서 세상을 향한 몸짓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슬픔을 머금은 자연 안에는 스스로를 치유하고 또 다른 길로 인도하는 순환의 고리가 있나 봅니다.
산을 내려왔습니다. 터덜터덜 걸으며 세상속 터널을 향해 발걸음에 무릎을 세워 들어왔습니다.
세상속에는 힘찬 아우성과 슬픔과 고통이 어우려져서 서로의 빛깔과 냄새를 나누어 가지며 휘청거리며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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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훈/ 클락스버그,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