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남부 주 대학들로 구성된 SEC(사우스이스턴 컨퍼런스)는 대학풋볼 최강 팀들이 몰려있는 컨퍼런스이다. 부동의 1위 팀인 앨라배마를 비롯한 대학풋볼의 만년 강호 14개 팀으로 구성돼 있다. 지역적으로는 앨라배마와 플로리다, 조지아, 테네시, 미시시피 등이 여기에 속해 있다. 이 지역 주민들에게 대학풋볼은 일종의 종교와 다름없다.
8월 말 올 대학풋볼 시즌이 시작되면서 SEC 스테디엄들은 항상 그래왔듯 재학생들과 지역 주민들, 그리고 타주에 사는 동창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꽉 들어차고 있다. 이들은 경기 내내 스테디엄이 떠나갈 듯 함성을 외쳐댄다.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에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을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럼에도 별다른 방역조치조차 없다. 마치 이들에게는 코로나19가 남의 나라 얘기인 것 같다.
이런 방역소홀이 더욱 우려스러운 이유는 SEC에 속한 주들의 코로나 백신 접종률이 다른 곳에 비해 너무 낮기 때문이다. 이들의 접종률은 37~41% 정도에 불과하다. 60%를 넘은 다른 주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도 방역은 너무나도 허술하기 짝이 없다.
코로나바이러스와 함께 무서운 속도로 전파되고 있는 또 하나의 바이러스는 백신접종 거부자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의 바이러스이다. 접종률이 형편없이 낮은 주들로 이뤄진 SEC의 무책임한 처사를 보노라면 왜 이런 분노가 치솟을 수밖에 없는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타인들의 따가운 시선과 질책에도 아랑곳 않은 채 백신접종을 거부하는 미국인들은 20% 내외에 달한다. 백신부정론자들은 팬데믹 이후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으면서 공격적인 백신거부 캠페인을 벌여왔다. 이들은 “지금이야말로 교육을 시켜야 할 때”라는 구호를 되풀이한다. 이 말은 “백신 관련 허위정보를 퍼뜨릴 때”라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이런 허위정보에 넘어가 백신거부 대열에 끼어든 미국인들이 적지 않다.
백신을 경시하거나 반대하던 극우 방송인들이 코로나19로 사망하는 일이 잇달아 발생해도 백신 거부자들은 꿈쩍하지 않는다. 백신의 과학적 효능과 안전성에 대한 객관적 사실들을 아무리 많이 들이대며 설득을 해도 잘 먹혀들지 않는다. 본래 설득은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 한편에는 논리적 권유에 대한 저항심리가 자리하고 있다. 다른 이들의 설득노력은 독립된 존재로서의 자유를 지키고 싶어 하는 나의 본능을 자극한다. 그럴 경우 아무리 타당한 논리와 사실을 들이대도 꿈쩍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믿음을 지적하면 할수록 그 믿음이 더욱 강고해지는 ‘역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백신을 둘러싼 논쟁과 설득이 긍정적인 결말로 이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잘해야 평행선으로 끝나고 관계가 손상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심지어 극단적 폭력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지난 주 일리노이에서는 평소 사이가 좋던 이웃 사이에 백신논쟁이 발단이 된 살인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관계 전문가들이 설득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언급하는 것은 ‘입’이 아니라 ‘귀’이다. 논리와 사실을 들이대며 압박하는 것으로는 설득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내가 말을 하기보다 상대방의 말에 먼저 귀를 기울여주는 ‘경청’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입이 아니라 귀에서 나오며 설득 또한 다르지 않다.
상대가 백신에 대해 허황된 얘기를 하더라도 말을 끊거나 공박하지 않으면서 귀를 기울여 주는 것이 궁극적 설득을 위한 첫걸음이 된다. 하지만 귀만 열어 놓은 채 계속 수동적으로 듣기 보다는 중간 중간에 상대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는 등 ‘공감’과 ‘호기심’을 드러낼 때 상대의 마음은 좀 더 쉽게 열리게 된다. 이것이 ‘반응 경청’(reflective listening)의 힘이다.
논어는 ‘이청득심’(以聽得心) 즉 “들음으로써 다른 이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설득 또한 다른 이의 마음을 얻는 행위이니 ‘이청설득’이라 할 만하다. 잘 듣는 것은 비단 리더들에게만 요구되는 자질이 아니다. 수평적 관계와 감성이 중요시되는 21세기에는 보편적으로 필요한 태도라 할 수 있다.
진심을 담아 귀를 기울이는 것은 백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접종 센터로 이끄는 데 뿐 아니라 부모와 자녀 간에 대화를 회복하고, 신념의 차이로 갈등하는 관계를 개선하는데도 유용한 지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훔치고 싶다면 ‘귀 큰 도적’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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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