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통령 선거 6개월을 앞두고 정치권의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분위기는 성실성이 결여된 가면극의 양상이다. 왠지 체력도 장비도 구비하지 않고 절벽을 기어오르는 군상들을 구경하는 듯한 기분이다. 국민 모두가 뭔지 모를 허탈감에 빠져 선거전을 관전할 것만 같다.
대통령 선거 후보들의 ‘상호검증’ 절차가 서둘러 압박 당하고 있다.
특수 정파, 몇몇 언론기관이 자기들 입맛에 맞는 후보가 불리해지자 “감정싸움 말고 정책 토론에 치중하라”는 억지 논리에 휩쓸려 ‘검증’이라는 중요 항목이 사그라들고 있다.
어느 틈엔가 ‘검증’을 하려 들면 네거티브(Negative) 그만하라고 윽박지른다. 검증이 어째서 네거티브(부정)란 말인가. 검증은 오히려 퍼지티브(Positive: 긍정) 요소가 더 많다. 검증은 업적과 실책을 가려내는 필수과정이다.
인구 7,500만의 한반도, 경제규모 세계 10위권인 대한민국을 이끌고 갈 대통령을 뽑는데 후보의 인격, 철학, 법적 범죄, 변태 행각, 정실인사, 공금횡령, 권력 남용 등등 모든 기록을 “적당히 넘어가자”라니 이 무슨 해괴한 주장인가.
민주주의의 근본을 요약해 보면 검증과 토론이다. 그래서 민주주의에 모든 국민의 의사가 반영되는 인권 존중이 있고 토론형식을 거침으로써 국가발전과 정의가 보장되는 것이다.
검증과 토론은 일종의 평가전이다. 하물며 대통령이 돼 보려는 후보 당사자가 검증을 가지고 “네거티브 공세 말라”, “사생활 관여 말라”, “법정에서 판결 난 일이다”, “더 이상 그 말 꺼내지 말라” 등등 발뺌 저항을 하다니 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본인에게 전과 경력이나 수치스럽고 민망한 과거가 많으니 덮고 가자는 주장이 아닌가. 아니면 말장난 잔재주로 국민을 속여 당선만 되고 보자는 사기극을 감행해 보자는 속셈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민주주의 경험이 일천했던 우리 국민은 그럴듯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인물의 선동에 현혹당해 지도자로 뽑아 놓고 나서 얼마 못가 번번이 땅을 치며 후회해 왔다. 이제는 그동안의 시련과 좌절을 교훈 삼아 냉철한 눈으로 정치현실을 파악하고 후보들을 분별 평가할 만큼 성숙했으리라 믿는다.
일반적으로 독재자들은 ‘검증’을 증오하고 자신의 경력을 애써 감추려 한다. 나치 독재 아돌프 히틀러, 공산주의 독재 스탈린과 김일성 등도 자신들의 과거 흔적이나 실정을 검증 토론하려 들면 반역으로 몰아 처형을 일삼았다. 독재자 박정희도 남로당 중요 동료 63명의 명단을 빼돌려 정일권에게 바쳤던 배신 경력을 끝까지 함구, 검증받기를 거부했다.
미국 케네디 전 대통령 3형제 중 막내 에드워드는 상원의원 시절 비서였던 메리 조 코페크네와 함께 치파쿼딕 강 다리를 운전하던 중 여비서가 익사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에드워드 케네디는 후보 경선 과정에서 검증을 받고 실격당하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미국 대법관 임명 청문회에서 후보 한 사람이 고교시절 마리화나를 피웠고 또 이 사실을 거짓말했다는 이유로 자진 사퇴할 수밖에 없었던 실화가 두고두고 기억난다. 미국 정치인들이 인간미 야박하고 의리가 없어서 그 후보를 사퇴시킨 것이 아니다. 공과 사를 구분하고 공직자로서의 기본 덕목으로 국가 정의와 법의 권위를 지키자는 의도였던 것이다.
대통령 중심제의 민주국가인 한국에서 지도자 선출이야말로 국가 명운을 좌우하는 행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연히 대통령이 되려고 나선 사람이라면 과거부터 현재까지 일거수일투족, 모든 것을 검증받고 평가받아야 한다. 그것이 후보로서의 국민에게 마땅한 도리이다.
검증이 겁날 만큼 숨기고 감출만한 사연이 있다면 후보직에서 자진 사퇴해야 한다. 용서받지 못할 험악한 경력을 뒤에 숨기고 후보로 나와 지나간 일이니 사소한 사생활이니 궤변으로 나라 분위기를 더럽히는 것은 가면 사기극이라는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런 인물이 행여 정권을 장악한다면 그 다음에 다가 올 갖가지 비극을 누가 감당해야 한단 말인가.
‘검증 기피’ 풍조는 민주주의의 퇴행 현상이다. 감정싸움 말고 이성적 판결이 절실하다. 검증은 네거티브가 아니고 퍼지티브다.
(571)326-6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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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용 전 한민신보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