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에서 ‘60대 타수는 외화를 벌어들여 국가를 먹여 살리고, 70대 타수는 가족을 먹여살리고, 80대는 골프장을 먹여 살리고, 90대 골프는 친구를 먹여 살리고, 100대 골프는 골프공 회사를 먹여 살린다.’ 골프 은어 중에서 오래 된 고전이다.
미국에 가면 골프는 실컷 치겠구나 하는 친구들의 말을 귓가로 흘리고 이민이라고 떠나 왔다. 미국은 어디를 가나 한국에 비해서 흔하고 싼 골프장이 많다. 그런데도 다 아는 일이지만 골프 칠 기회를 갖는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다.
지금은 한결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한국에서 ‘골프를 한다는 것’은 돈과 시간을 떠나서도 사치스럽고 그래서 그에 따른 여러가지 제약이 뒤따른다. 변변치 않은 배경을 가진 필자가 1990년대 30대 초반 과장시절에 ‘골프’를 시작했으니 직장과 가정으로부터 어떤 압력(?)들이 있었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한겨울 4시에 일어나 겨울바람 가르며 1시간 반 동안 운전해서 골프장에 도착하면 새벽 6시, 어찌어찌해서 첫타석 이전에 번외로 타석을 만들어 준 것만으로도 하해 같은 은혜로 알고 오리나무로 만든 1번 드라이버 채를 가지고 호호 불며 그렇게 티샷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만 했었다.
그렇게 시작한 골프가 30년이 다 되어간다. 귀가 얇은지, 철이 없는 건지 누군가 좋다고 권하면 두번 생각도 않고 덜컥덜컥 발부터 먼저 나가버리는 성질머리 때문에 그런 황당무계하게 골프에 입문했다.
그 골프가 인연이 되어 골프 후배 따라 골프백 들고 시애틀에 내렸고, 또 시애틀에서 빈둥거리다 골프장에서 만난 분이 이민스폰서 안내해 줘서 이곳 메릴랜드에 왔다. 골프 치다가 알게 된 친구가 타이어 사업하길래 팔자에 없는 타이어사업을 10년동안 했다.
그러는 중에 어떤 모임에서 하는 토너먼트에 우연히 골프하러 갔다가 그 모임의 회장도 하고, 거기서 만난 후배가 마라톤 하자고 해서 또 마라톤도 하게 되었다. 사업이 비실거려도 골프는 했던지 골프 치면서 이런 저런 사업이야기 하다가 우연히 현재 비즈니스를 하게 되었으니, 골프에 죽고 살고 한 것도 아니면서도 이렇듯 골프와 반평생을 같이 해 왔다.
그렇게 골프를 했으면 ‘골프신’의 반열에 서 있음직도 했지만 어느 글에서도 고백했다시피 4명 중에서도 1등을 못한다. 홀인원 한번도 못해 봤다.
이런 걸 옆에서 30년 지켜보기만 했던 옆사람은 어떻겠는가,
작년 가을에 우연히 와이프와 마라톤을 같이하던 와이프 후배가 “언니, 골프 한번 할래요?” 그 말 한마디에 그토록 저주(?)하던 골프를 하겠다고 해서, 긴가민가 했더니, 그 날로부터 골골골골, 아침부터 저녁까지 ‘골’로 시작해서 ‘골’로 끝나는 나날이 지속되길 9개월, 본업도 팽개치기 직전이오, 딱 쳐다보면 두 눈에 ‘골’자만 보였다.
나이 60도 넘은 여자가 하면 뭘 하겠다고 저러는고, 한편으로는 짠하고, 한편으로는 기특(?)하기도 했다. 부부간에 골프, 운전 가르치다가는 이혼한다는 말도 있던데 이 나이에 이혼이고 뭐고 간에 시간관계상 하나 둘씩 걸음마부터 가르쳤다. 아니나 다를까, 작년 가을 필드에 처음 데리고 나가서 여차저차 해라 하고는 내 티박스에서 폼나게 티샷을 보여주려는 데, 그게 맘대로 되나.
그날따라 나의 티샷은 여지없이 삑사리가 나버린다. 지켜보던 와이프, 대번에 치고 들어온다. “자기도 못치면서…” 그러기를 9개월, 지금은 100타를 깨보겠다고 저렇게 발버둥이다.
그 어마무시하다는 ‘매릴랜드여성골프회’에 가입해서 칼같은 골프룰도 즐기는가 싶더니, 지난 일요일에는 메릴랜드 지역의 조그만 토너먼트(40명)에 나간다길래, 그 날 아침에 ‘이구동성’, ‘2구를 잘치면 성공하는 것과 같다’고 코치해 줬는데 세컨 샷도 필요없이 덜컥 ‘홀인원’을 해 버렸다.
이걸 축하해 줘야 하는지, 지금도 어리벙벙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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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구/사람사는 세상 워싱턴 메릴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