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7년 미국의 정신과 전문의와 심리학자 27명은 트럼프의 정신세계를 분석한 내용을 모은 책 ‘도널드 트럼프라는 위험한 사례’(The Dangerous Case of Donald Trump)를 펴냈다. 미국 정신과학회 윤리원칙은 정신과 의사가 직접 진단하지 않은 공인에 대해 전문가로서 의견을 밝히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골드워터 규칙’이라 불리는 조항이다.
하지만 정신과 전문의들과 심리학자들은 논란을 무릅쓰고 이 책을 발간했다. 이들이 내세운 근거는 파괴적 권력에 맞서 의료인들이 목소리를 내도록 규정하고 있는 ‘제네바 선언’이었다. 정신과 전문의들이 ‘제네바 선언’을 언급해야 했을 정도로 그들 눈에 트럼프는 너무나도 위험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들의 결론은 “트럼프처럼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에게 수많은 사람들의 생사가 걸린 대통령이라는 권력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권력은 부패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던 정신질환을 확대하기도 하고 심지어 새로운 질환을 야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왜 어두운 예감은 빗겨가는 일이 없는 것일까. 이들의 우려와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대중의 호기심과 가십거리 정도로 소비되던 트럼프의 자기애와 과대망상은 그의 백악관 입성 후 한층 더 증폭되고 악화됐다. 이런 정신상태를 지닌 권력자는 측근들의 아첨과 극성 지지자들의 열렬한 환호만을 스스로에 대한 정당한 평가로 받아들인다.
트럼프의 정신세계는 너무 복잡해 한 두 개의 진단명만으로는 정확히 기술하기 힘들다. 다만 대통령 선거에서 진 후 그가 보이고 있는 행태는 전형적인 편집증의 특징을 드러낸다. 편집증에 사로잡히면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망상장애가 나타난다. 트럼프는 오로지 ‘대선사기’만을 주장하면서 자신이 곧 대통령에 다시 취임하게 될 것이라는 현실성 없는 얘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대통령으로서 훈수 둘만한 다른 일들도 많을 텐데 대선을 도둑맞았다며 거짓말을 퍼뜨리는 일에만 열심이다. 트럼프의 한 전직 보좌관은 “통속 맨 밑바닥 미치광이들의 소리만 울려 퍼지는 ‘메아리 방’(에코 체임버)에 갇혀 있는 것 같다”고 트럼프의 현 상태를 묘사했다.
트럼프가 편집증적으로 무분별하게, 그리고 무책임하게 뿌려대고 있는 망상의 씨앗들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트라우마의 경우처럼 망상 역시 집단적인 형태로 확산되곤 한다. 한 설문조사에서는 공화당원의 거의 3분의 1이 트럼프가 올해 다시 대통령으로 취임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망상은 트럼프가 노동절 전에 연방대법원에 의해 다시 대통령에 취임하게 될 것이라는 음모론으로 가공돼 큐어넌 추종자들 통해 확산되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허황된 내용인지는 8월이 연방대법원의 휴회기간이라는 사실만 떠올려도 바로 깨달을 수 있다. 트럼프에게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품위나 국민통합을 위한 긍정적 역할은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몰상식할지는 몰랐다.
자존감 부족으로 인한 심리적 허기를 대중의 추종으로 메우려는 허장성세 지도자와 맹목적인 추종자들 사이에 형성되는 관계는 건강하다고 할 수 없다. 지도자의 거짓과 심리조작에 끌려 다니게 되고 점점 더 현실인식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러면 사회적 긴장감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렇듯 트럼프가 퍼뜨리고 있는 망상은 개인의 정신건강 차원을 넘어 사회를 분열시키고 기본가치를 위협한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해결이 쉽지 않다.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인자(因子)의 제거를 이런 증상의 치료를 위한 첫 걸음으로 정신과 전문의들은 꼽는다. 정치의 영역에서는 통상적으로 유권자들이 이런 결정을 내려준다. 그런데 트럼프는 유권자들의 결정이 나왔음에도 정치무대 뒤로 사라지기를 거부한 채 극렬 지지자들을 볼모로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무책임한 선동을 계속하고 있다.
트럼프와 그의 추종자들이 상식과 이성의 궤도를 벗어나면 공화당이라도 제자리를 지켜야 할 텐데 트럼프 눈치를 보느라 할 말도 하지 못하는 비겁한 모습이다. 책임 있는 공당의 자세가 아니다. 한 번의 메시지로 부족하다면 알아들을 때까지 계속 경고를 해줘야 한다. 결국 트럼프가 야기하고 있는 ‘집단 망상’으로부터 미국을 건져낼 수 있는 것은 정신과 전문의들이나 정치인들이 아닌, 건강한 판단력을 갖고 있는 유권자들뿐이라는 것을 다시금 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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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