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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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소녀의 운명

2021-06-21 (월) 유영집 / 전직 조종사,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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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중학교에서 똑똑하고 모범생인 두 여학생이 졸업하게 되었는데 한 여학생은 부잣집 딸로 명문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고 한 여학생은 아버지가 안 계신 관계로 가정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서울에 올라가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
서울에 올라온 가난한 집 여학생은 가장 역할을 해야 했다. 그녀의 목표는 남동생이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학비를 대 주는 것이었다. 야근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 하는 그녀를 공장에서는 “억순이”라 불렀다. 누나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에 남동생은 6년 동안 무사히 중, 고등학교를 마쳤다.

대학에 진학한 남동생은 군에서 장교로 장기 복무하는 조건으로 군 장학생에 선발되어 재학 기간 국가로 부터 등록금 전액을 지원 받으며 공부할 수 있게 되자 그녀는 한시름 놓았다.
공장에서 그녀의 책임감과 성실함을 눈 여겨 본 과장은 그녀를 사무직으로 자리를 옮겨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이 못다한 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 날부터 고등학교 과정 검정고시를 틈이 나는 데로 준비하기 시작하여 1년 후 합격하였다.

너무나 기뻤다. 그러나 그녀는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에 방송통신대학에 지원하여 학업을 계속 이어 갔다. 대학을 마치고 그녀는 대단한 결심을 하게 되는데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공장을 그만 두기로 했다. 그리고 3년간의 준비 끝에 사법고시에 합격하게 된다.
그녀는 세상을 다 가졌다는 행복감을 뒤로 하고 국가 공무원 5급 사무관 특채에 지원하여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녀의 꿈이었던 시골에 아담한 집도 지어 어머니에게 마련해 드리는 효녀였다. 앞서 부잣집 친구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다고 한다. 27년의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그녀는 변호사로 제 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몇 년간 변호사를 하면서 그 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보니 만감이 교차되었다.
어느 날 전화 한통을 받게 되는데 공장에 다닐 무렵 힘들 때 마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자매처럼 지냈던 친구가 사기를 당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돈이 없어 법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억울한 피해자를 위해 무료 변론도 하기로 결심한다. 학비를 대준 남동생은 32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했는데 누나가 호출하면 불문곡직 (不問曲直- 옮고 그름을 묻지 아니함)하고 한밤 중에라도 달려오는 착한 동생이다.
세월이 흘러 그녀가 칠순이 되는 해였다. 그동안 도움 받았던 의뢰인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조촐한 그녀의 칠순 잔치를 마련했다. 행사 중 몇몇 의뢰인들이 자신들의 지나간 사연을 담은 감사의 편지를 낭독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 사연을 듣고 있던 그녀의 볼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악한 끝은 없어도 선한 끝은 있다”고 돌아가신 친정 어머니께서 평소에 하시던 말씀이 생각 났다고 한다.
행사에 참석한 많은 하객들은 그녀의 수고와 헌신에 아낌없는 축하와 격려를 보내 주었다.
그런 상황을 지켜본 그녀의 친척들과 자손들은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했을까?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말이 있는데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묵묵히 개척해 가는 그녀의 모습은 당당하고 멋지기만 하다.
마음이 따뜻하고 훈훈한 그녀의 아름다운 인생의 여정은 계속되지 않을까?

<유영집 / 전직 조종사,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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