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어귀인 6월초, 브루드 X(Brood X) 매미들의 대합창에 취해 있다.
행복한 비명이란 표현을 써도 될까. 이른 아침 창밖에서 울려오는 매미들의 대합창, 신비한 생명력을 호흡한다. 분명히 이런 일상은 축복임에 틀림없다.
아무튼 올 6월은 내게 있어 매미들의 음악축제에 젖어 황홀하게 흘러가고 있다. 오! 저 웅장한, 한편으론 겸손하고 그윽한 수백억 마리 매미들의 대합창은 신의 소리가 아니던가. 수많은 이 매미들이 저마다 ‘판소리’ 명창처럼 득음(得音) 경지에 어떻게 오를 수 있었단 말인가.
귀먹은 루드비히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그 소리, 영감으로 받아 적은 마지막 교향곡 ‘대합창(제9번)’. 어찌해서 수백억 마리의 매미들의 음정, 박자 하나 틀리지 않고 화음을 이루며 이렇게도 유려한 대합창을 쉬지 않고 공연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매미들의 대합창은 환상으로, 슬픔으로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돌연 신비로움이 감돌면서 무아(無我) 지경으로 빠져들고 만다.
13세기 초 고려 때 몽고군의 침략을 막아내려는 염원으로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 과장하지 않고 말해도 팔만대장경의 완성은 세계 인류가 기적의 표본으로 삼아도 손색없는 대작이다. 연인원 수 만 명이 동원돼 바닷물에 절였다가 꺼내서 말린 송판 위에 불경을 각인해 놓은 것이 팔만대장경이다.
그런데 이 팔만대장경 필체(글 모양)가 한 사람이 쓴 것처럼 한 자도 틀림없이 똑같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뭔가. 경상도 합천 해인사에 팔만대장경이 보관돼 있다.
현대 문명의 기기인 에어컨이나 통풍 환기 장치나 방부제 하나 안 쓰고 고스란히 원형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 오히려 안전 보존 강화를 위해 에어컨 등을 설치했더니 작품에 손상이 가고 훼손 징조가 보여 즉시 철수시켰다는 소식이다. 팔만대장경, 누가 이를 기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매미들의 곡조와 박자와 음향이 한결같은 이 현상에 팔만대장경과 뭔가 일맥상통하는 감격이 와 닿는다.
17년 동안 땅속에서 매미들의 수행목표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어느 날 동시에 깨달음을 얻고 일제히 같은 곡목을 합창하는 그 동기에 신비감이 더해진다. 신의 소리인가, 한 맺힌 절규인가. 아니 하늘과 소통한 그 기쁨을 자랑이라도 하는 건가.
도무지 수백억 마리 매미들의 거대한 음악 데몬스트레이션(demonstration) 앞에 한없이 왜소해지는 나 자신을 절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매미 군들의 억양, 박자 하나 틀리지 않는 부르짖음인지 노래인지도 확실치 않은 메시지 내용이 무엇인지도 알 길이 없어 답답함 또한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느 옛 시인은 “매아미 맵다 하고 쓰르라미 쓰다 하네, 매워도 맵다 말고 쓰도 쓰다 말고, 눈감고 귀 막고 보도 듣고 말리라”라고 읊었다.
누가 뭐라 해도 유럽 일대와 미 동부 지역에서만 나타난다는 특이한 17년 만의 매미의 대향연은 감상하는 사람들 각자의 몫으로 나누어 놓겠다.
하루 이틀 천둥 번개 비가 내리더니 매미들이 일제히 합창을 멈췄다. 이 신비로운 행동통일에 갖가지 있을법한 상상들이 머릿속에 맴돈다. 진퇴가 분명해야 한다는 저들의 계율인가.
계절따라 여기 저기 장미는 만발하였는데 사명을 다 한 매미 시신들이 하늘을 보고 누워있다. 영혼이 빠져나간 육신의 무의미함을 증언하는 것일까.
수백억 거대한 브루드X 매미 군단이 뭔가 인류에게 경고나 교훈을 남기고 갔는데 그 진의가 제대로 우리 영혼과 교감되지 못한 것 같아 아쉽기 그지없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렇게도 내 심금을 흔들고 간 매미들의 17년 만의 외출 그리고 그들의 혼백은 어디로 누구를 찾아가 버린 걸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다 이루었도다, 다 이루었도다”를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처럼 그들도 신이 내린 소명을 이루고 떠난 것이 아닌지 미련이 길게 이어진다.
아무튼 올해 6월은 매미들이 남긴 알 듯 모를 듯 그러면서도 한껏 호기심과 신비스러움의 경지에 빠져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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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용 / 전 한민신보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