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이후 1,000년 넘게 한민족은 일본의 스승이었다. 쌀 농사와 철기 제작 등 먹고 사는 문제에서 한자와 유교, 불교 등 정신 문화에 이르기까지 일본 문명의 뿌리 중 상당수는 한반도에서 건너 간 것이다. 그런 한민족이 어떻게 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것일까.
조선 몰락의 원인은 여러가지지만 그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 사건을 하나 들라면 신미양요를 꼽지 않을 수 없다. 1871년 6월 존 로저스가 이끄는 미 아시아 함대는 강화도를 침공했다. 문호 개방을 요구하는 미국 측 요구를 조선이 거부하고 발포하자 이를 응징한다며 600여명의 미군이 강화도에 상륙했다. 3일간 계속된 전투에서 순무중군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 300여명은 거의 전멸하고 어 장군도 사망했다. 미군 피해는 3명 사망 10명 부상이었다.
그럼에도 여기서 조선군이 보여준 용맹함에 놀란 미군은 더 이상의 공격을 중단하고 귀환했다. 조선을 무력으로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훨씬 많은 군대가 필요한데 당시 미국으로서는 그만한 여력도 가치도 없다고 본 것이다. 미국의 퇴각을 본 대원군은 기고만장해 전국 200곳에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왔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하자는 것이요 화친은 곧 매국이다. 자손 만대에 경고한다”는 내용의 척화비를 세운다.
이보다 앞서 일본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었다.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이 이끄는 흑선이 지금의 도쿄인 에도만 우라가 앞바다에 나타나 개항을 요구한 것이다. 일본은 결국 미국의 힘에 굴복해 문호를 개방하고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불평등 조약을 맺고 만다. 이 사건은 그러지 않아도 도쿠가와 막부의 무능과 부패에 불만을 품고 있던 영주들의 분노를 촉발시켜 1868년 메이지 유신의 도화선이 된다.
이들은 처음에는 ‘왕을 받들고 오랑캐를 배척한다’는 ‘존왕양이’를 들고 일어났지만 일단 집권한 후에는 서양 따라 배우기로 선회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1871년의 ‘이와쿠라 사절단’이다. 당시 실세인 이와쿠라 도모미가 이끈 이 사절단은 2년 동안 유럽과 미국을 돌아보며 영국의 해군과 공장, 독일의 육군과 교육 제도, 프랑스의 행정, 미국의 의회 민주주의 등 각국의 문물을 깊이있게 배운다. 이 사절단에는 학자와 유학생은 물론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등 당시 정계의 실세들이 동행했으며 이는 훗날 일본을 근대 국가로 탈바꿈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같은 해 한 나라는 서양 오랑캐를 물리쳤다며 문을 걸어 잠그고 이웃 나라는 서양 문명의 우월함을 인정하고 자신의 혼이나 다름없던 사무라이 계급마저 철폐하며 근대 국가의 기틀을 닦았다. 그 후 역사는 익히 아는 바다.
물론 신미양요와 이와쿠라 사절단이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갈라놓은 원인의 전부라 말할 수는 없다. 둘 다 수백년간 쇄국 정책을 폈지만 철저하게 서양과의 교류를 막은 조선과는 달리 일본은 나가사키에 데지마란 인공섬을 만들고 네덜란드와의 접촉을 허용했다. 서양을 향한 창 하나는 열어둔 셈이다.
또 무능하고 부패한 조정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고 있던 조선과는 달리 일본은 지방 영주들이 상당한 자치권을 갖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당시 사쓰마라 불리던 규슈 남단의 가고시마 영주는 서양 문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배우려 노력했다. 사쓰마의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공방을 짓고 서양식 기계 제조를 연구했으며 서양식 조선소를 세우기도 한 사람이다. 다시 말해 일본에는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졌을 때 이를 대체해 새로운 정책을 펼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반면 조선에서는 북학파 등 실학자들이 중국을 통해 전해진 서양 문물에 대해 관심을 갖기는 했으나 이들은 대부분 권좌에서 밀려난 남인들로 아무 실권이 없었다.
그럼에도 같은 해 다른 방향으로 간 두 나라의 운명이 판이했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강화도에서 조선군이 궤멸하고 에도에서 이와쿠라 사절단이 서양으로 출발한 지 150주년이 되는 지금 한국에서 이 두 사건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제로다. 고작 신미양요 때 미국에 빼앗긴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장군기)를 2007년 임대 형식으로 돌려받아 강화 전쟁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데 이를 영구 반환받아야 한다는 게 이와 관련된 뉴스의 전부다. 친일파 단죄에 열을 올리는 것도 좋지만 어쩌다 조선과 일본의 운명이 달라지게 됐는지 그 원인을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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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