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길 잃은 승무원과 뜻밖의 인연

2021-06-02 (수) 최숙자 / 비엔나, VA
크게 작게
우리 동네로 들어오는 큰길에 작년부터 확장 공사가 시작돼 내년 말에나 끝날 예정이다.
우리 부부는 이 큰길과 동네 사이에 있는 콜빈 런 밀 파크를 따라서 헌터 밀 로드를 건너 레이크 페어팩스 파크까지 가끔 걸어서 돌아오곤 한다. 이 길은 동쪽으로는 마운트 버넌, 서쪽으로는 퍼셀빌까지 연결되는 W & OD(Washington & Old Dominion) 트레일로 하이킹과 마운트 바이킹을 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아름다운 산책 코스다.
그런데 얼마 전, 산책하고 돌아온 남편이 운동 후 집에서 쉬고 있는 나를 바깥으로 나와 보라고 급하게 불렀다.

무슨 일인가 하고 나가 봤더니, 저 큰길 가까이서 길을 잃은 한 젊은 백인 여성이 도움을 요청해 왔다며, 백발의 노인인 남편은 혼자서 전혀 모르는 여자를 차에 태우고 가기가 불안하다고, 함께 그녀를 호텔까지 데려 주자고 제안했다.
그녀는 영국 런던과 미국 워싱톤을 왕복하는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소속 승무원인데 그날 우리 집에서 약 4마일이 넘는 거리에 위치한 하얏트 호텔에서부터 숲길을 따라 2시간 가까이 산책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집 근처 공사 구간에서 GPS가 혼동돼 길을 잃고 당황하던 차에 때마침 남편을 만났고, 급히 도움을 요청하게 됐다고 한다. 급박하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 이유는 길을 잃다 보니 비행기를 타러 가는 시간이 촉박해졌고, 다시 걸어서는 돌아갈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녀를 호텔까지 바래다 주면서, 우리는 서로 이메일 주소도 교환하고,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50대 중반의 그녀는 자기의 고향이 스웨덴이라며, 현재 영국에 살고 있다고 한다. 20여 년 넘게 승무원으로 근무하며 전 세계를 다녔고, 한국도 방문했다고 한다.


그녀는 “안녕하세요” 등 기본적인 한국 인사말 정도는 할 수 있었기에 우리는 처음 만난 그녀에게 더욱 친근감을 느꼈다.
호텔로 가는 차 안에서 내내 고맙다는 말과 함께 어떻게 이 친절에 보상하느냐고 하는 그녀에게, 우리는 좋은 여행 목적지를 추천해 달라는 말로 우리 마음을 대신 하며, 대화를 하다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음 날, 그녀는 잊지 않고 우리 부부에게 따뜻한 마음이 담긴 장문의 감사 이메일을 보냈다.

그 이메일에는 “우리의 선행이 남을 통해 보상받으리라”라는 덕담과 함께 앞으로 서로 연락하고 지내자는 말도 덧붙여 쓰여 있었다.
최근 인종차별과 특히 아시안에 대한 증오 범죄가 무척 심해졌다. 하기야 가족과 친구 사이에서도 서로 의견이 다르면 이를 이해하려고 하기 이전에 우선 비판부터 하고 증오하는 사막 같은 마른 세상이다.
사실 요즘 우리 부부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화평의 세상이 오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미국에 사는 아시안인 우리가 영국에 사는 스웨덴 백인 여성을 도울 기회가 생겼다. 이렇듯 늘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기회를 주시고, 작은 선행을 통해 뜻밖에 새로운 인연을 맺도록 허락해 주신다.

이제는 어느 곳에 가든 제일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하는 우리 부부는 이 세상 남은 시간을 더욱 더 보람 있게, 누군가 도울 기회가 많기를 간구한다.
오늘은 모처럼만에 내리는 빗속에서 희미하게 생각나는 그녀를 떠올리며 그녀가 추천한 코펜하겐(덴마크), 스톡홀름(스웨덴), 오슬로(노르웨이), 헬싱키(핀란드) 등 스칸디나비아 국가를 꼭 가 봐야겠다는 마음을 다진다.

<최숙자 / 비엔나, VA>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