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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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속의 매운탕

2021-05-29 (토)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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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운탕 찌개 냄비 속에서 고국의 냄새가 끓고 있다.

“매운탕 하나는 내가 잘 끓이지. 지금부터 왕년의 솜씨를 보여줄게.” 하고 가로막으며 그는 넓지 않은 부엌을 혼자 다 차지했다. 남편이 끓인 매운탕은 내 식성에 별로 맞지 않아서, 그리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비켜선다. 나는 비린 것을 좋아하지 않아 가능하면 여러 가지 재료를 함께 넣어 비린 맛을 감춘 바특하게 끓인 국물을 좋아한다. 그런데 남편은 최소한의 재료만을 넣어 싱겁게 끓여, 매운탕 국물이 담백하기는 해도 좀 밍밍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만든 음식에 오늘따라 필요 이상 너스레를 떠는 남편은 국물 맛을 보며 “히야! 캬아!” 하고 온갖 희한한 감탄사를 다 동원한다. 식탁으로 옮겨온 돌냄비 속 국물이 매캐한 향을 풍기며 한참 동안 보글거린다. 뭔가 빠진 것 같다는 허전함 끝에 냉장고에서 소주병이 불려 나오고 작은 유리잔에 말간 액체가 졸졸 소리를 내며 부어졌다.


그뿐이었다. 붉은 국물 앞에서 소주병 마개를 따고 잔에 따른 일밖에 없다. 그런데 그 단순한 동작이 불러온 파문은 심상치가 않다. 무섭게 가슴을 내리누르는 적막이 식탁 주위에 스며들었고, 우리는 그 불투명한 적막이라는 존재 때문에 붙을 듯 가까이 앉아있으면서도 서로를 들여다보지 못한다.

문득 머릿속에 마른번개가 스치고 지나갔다. 장을 보러 가서 생선을 사자고 할 때부터 뭔가 꺼림칙했는데, 비린내 때문이 아니었구나. 아무리 끓여도 가시지 않던 비릿한 고향의 냄새를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했구나. 매운탕만 끓이면 남편의 안경 너머로 뿌연 김이 서리던 기억을 내가 왜 잊고 있었을까.

탕은 아직도 기세 좋게 거친 호흡을 뿜어내고 있다. 안경에 허연 김이 잔뜩 서려 있어 남편의 눈을 내가 읽을 수 없으니 오히려 다행이다. 그러나 금세라도 무언가 그의 밥공기로 툭, 떨어질세라 나는 가슴을 졸인다. 요리할 때와는 달리 연신 매운탕 건지를 뒤적이면서도 침묵을 퍼가는 그의 표정 잃은 얼굴에, 내가 지레 질식할 것만 같아 나는 무엇인가 찾으러 가는 척 일어섰다. 순간 그의 손이 내 손목을 지그시 눌렀고 나는 가슴을 들킨 민망함을 어정쩡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주저앉고 만다.

오래 산 부부 사이에는 겹겹이 감추어도 웬만큼은 알게 되는, 함께한 세월이 들어있게 마련인지. 빛바랜 항아리에서 퍼 올린 오래 묵은 시간의 잔을 비우고 밑바닥에 엉겨 붙은 기억의 찌꺼기까지 남김없이 들춰내며, 가슴속 향수를 우리는 밤늦도록 그렇게 달래야 했다.

이민 오기 전의 자신감 있던 세월을 이야기하는 남편 얼굴이 시간이 갈수록 붉어진다. 그의 자신감은 젊었었기 때문도 아니고,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여유에서 비롯되지도 않았으리. 다만 내 나라 사람끼리 살을 맞대고 비비며 내 나라 언어로 말할 수 있던 거침없는 시절을 그리 표현했으리라. 혹시 내가 짐작하던 말이 쏟아져 나오면 어쩌나 싶어 시선을 피하며, 충혈된 눈자위를 핑계로 나는 그를 이불 속으로 밀어 넣는다.

“우리……,” 남편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난다. 나는 말줄임표의 의미 따위는 외면하고 싶다. 힘없이 누운 남편의 얼굴을 보며 그가 김 서린 안경 너머로 애써 가두려던 ‘그것’의 정체를 아내인 내가 더는 모르는 척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그는 이제 휘청거릴 만큼 고향이 그리운지 모른다.

다 식어 빠진 초라한 찌개 냄비를 치우며, 고기 살이 흩어져 앙상한 뼈만 드러낸 생선도 숟가락에 말라붙은 고춧가루도 서러워 나는 빈 식탁 의자에 몸을 부린다. 밤은 깊어가는데 정신은 또렷하고 몸은 천근이다. 나는 지금 내가 무엇을 서러워하는지조차 알지 못하겠다. 피할 수 없이 가까이 다가온 불투명한 정체가 또다시 새로운 삶을 향한 막막한 출발을 의미한다면,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지 두려울 따름이다. 정체 모를 살벌한 눈보라를 견디지 못해 황량한 온타리오 호숫가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환영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가슴이 답답할 때면 달려가 위안을 받고 돌아오던, 내게는 향수 처방 약 같은 호수이다.

접을 것 모두 접고 단념할 것 모두 단념하고 떠나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기에는 그의 가슴이 아직 젊은가. 낯선 이국에서 이제 겨우 마음 붙이고 일어섰는데, 아직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인데, 하며 나는 나대로 가슴이 마른다. 매운탕 한 그릇에 흔들릴 마음이었다면, 우리는 왜 그토록 힘들여서 이 먼 캐나다 땅까지 와야 했을까.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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