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빅폴과 데이비드 리빙스톤

2024-10-1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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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빅토리아 폭포를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뜻을 같이하는 분들과 함께 아프리카에서 수고하시는 선교사님들을 위로하며 사역에 협력하기 위해서였다. 나이아가라 폭포, 이과수 폭포와 세계 3대 폭포로 꼽히는 빅토리아 폭포(빅폴)는 잠비아와 짐바브웨 사이 잠베지 강에 위치하고 있다. 스코틀랜드인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영국 여왕의 이름을 따서 짐바브웨에서 붙인 이름이지만 잠비아 쪽에서는 토착 이름인 ‘천둥소리 내는 연기’라는 뜻의 ‘모시오아툰야’ 폭포라고 부른다. 빅토리아 폭포는 너비 1.7 킬로미터와 높이 108 미터의 규모인데 이번에는 가뭄 때문에 강물이 많을 때의 장관은 보지 못했다.

가난한 스코틀랜드 가정에서 태어난 데이브드 리빙스톤은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열 살 무렵 면직공장에 다녀야 했는데 성장 후 19세기 영국의 위대한 탐험가로 30년간 남부·중부·동부 아프리카를 탐험했다. 1855년 11월 16일 잠베지 강에서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면서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빅토리아폭포를 발견했고, 노예무역을 약화시킬 수 있는 합법적인 상거래를 활성화하기 위해 대서양 연안 루트를 찾아 나섰다. 그 이전에는 어떤 유럽인도 감행하지 않았던 모험이었다. 그는 탐험가이자 의사, 선교사이자 노예폐지론자였다. 아프리카에 대한 서구의 태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미흡한 장비만으로 아프리카를 깊숙이 여행하고 탐험했다. 유럽인에 의한 최초의 아프리카 횡단이다. 1871년 3월 그는 병을 앓으면서도 배를 타고 콩고 강을 탐험했다. 중부 아프리카를 둘러보고 나일 강의 근원을 찾겠다는 여정이었다. 그를 버리고 떠난 흑인 하인들은 잔지바르로 돌아가 리빙스턴이 살해됐다고 거짓 보고했다. 그의 종적은 묘연해졌고 그를 찾기 위해 수색대가 파견됐다. 1871년 11월 10일 뉴욕 헤럴드 특파원 M 헨리(Henry Morton Stanley)가 현재 탄자니아 땅인 탕가니카 호수 인근에서 병중에 있는 그를 찾아냈다. 헨리는 모자를 벗으며 리빙스턴에게 말했다.

“닥터 리빙스턴, 맞으시죠?” 헨리가 가져온 약으로 그는 간신히 몸을 회복한 듯 보였지만 영국으로 돌아가자는 헨리의 간청은 거절했다. 그는 나일 강의 원류를 찾고 노예무역을 근절하겠다는 사명감으로 탐험을 이어갔고 그의 병은 깊어졌다. 1873년 5월 현재 잠비아 북부인 치탐보(Chitambo)에서 흑인 하인들은 침대 옆에서 기도하듯 무릎을 꿇은 채 숨진 그를 발견했다.


잠비아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 대한 그의 애정은 분명하다. 불행히도 그가 개척한 교역 루트를 이용한 것은 노예상인들이었다. 중앙아프리카 루트가 개척됨으로서 인도양을 중심으로 한 노예무역은 오히려 활발해지기 시작했고, 잔지바르 노예시장은 중앙아프리카 최대라고 불릴 만큼 성장해버렸다. 정작 리빙스턴은 생애 막바지에 도달하기까지 노예무역 폐지를 목표로 삼아 활동했었다. 그는 저서나 편지를 통하여 당시 포르투갈 영토와 잔지바르에서 이루어지는 노예시장을 철폐해 줄 것을 수차례 요청했고, 이에 노예상인들은 그의 탐험을 방해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암살까지 시도하였다. 그의 청원운동은 1871년 영국 하원에 요청서가 제출됨으로서 결실을 맺게 되었고 후에 잔지바르의 노예시장은 폐쇄되었다.

어려운 환경, 인종 차별, 교육, 보건의 부재로 어려운 처지의 아프리카인들을 위한 데이비드 리빙스톤의 사랑과 열정은 어디에서 끊임없이 나왔을까? 필자가 이번에 빅폴에서 만난 아프리카 20 개국에서 오신 36 가정의 선교사님들 마음은 잃어버리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데이비드 리빙스톤 보다 못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구동성으로 선교사님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큰 사랑에 비하면 그 분들의 희생은 오히려 부족하다고들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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